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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12) 튜더 가문 : 잉글랜드 왕가

엘아라 2020. 2.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튜더 가문 별로 할것없어요..ㅠ.ㅠ

복잡한 왕위계승문제나 이야기하면 될까요 -0-;;;


유럽의 통치 가문들....(12) 튜더 가문 : 잉글랜드 왕가


튜더 가문은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의 통치 가문이 됩니다.튜더 가문은 원래 웨일스 지역이 기반이었습니다. 웨일스가 복속된것이 에드워드 1세 시기였는데 이후 웨일스 지역은 잉글랜드에 완전히 통합되지는 않고 애매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마 이것은 웨일스 인들에 대한 잉글랜드 인의 차별 역시 한 몫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웨일스쪽 가문 출신이었던 헨리 튜더가 왕위에 오르면서 웨일스 지역은 튜더 왕가에 매우 협조적이 되었으며 결국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완전히 통합하는 계기가 됩니다.


튜더 장미, 튜더 가문의 상징

이전의 랭카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이 흰 장미를 상징으로 가지고 있었다면 튜더 가문은 이 두가문이 결합했다는 의미로 이렇게 희고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씁니다.


헨리 튜더는 어머니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를 통해서 랭카스터 공작 가문의 후계자 지위와 더불어 잉글랜드 왕위계승권리를 물려받았습니다. 보퍼트 가문은 랭카스터 공작 가문의 방계 가문이었는데,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한뒤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랭카스터 공작 가문 직계는 물론 방계 가문이었던 보퍼트 가문의 남성직계가 모두 단절되게 됩니다. 남성 후계자들이 모두 죽자, 보퍼트 가문의 여성 후계자중 가장 왕위계승권리에 가까웠던 여성이 헨리 튜더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였습니다. (랭카스터공작 곤트의 존-서머셋백작 존 보퍼트(보퍼트 가문에서는 장남)-서머셋 공작 존 보퍼트(장남)-레이디 마거릿 보퍼트-헨리 튜더)


헨리 7세

붉은 장미를 들고 있죠 이것은 그가 랭카스터 가문의 후계자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헨리 튜더는 이런 권리를 발판으로 잉글랜에서 세력을 모았으며 더불어 웨일스 출신인 친가를 통해서 웨일스에서도 세력을 모았으며 결국 리처드 3세를 전투에서 물리치고 왕위를 얻게 됩니다. 이것은 잉글랜드의 "정복왕 전통"을 계승한 것이기도 했죠. 결국 헨리 7세는 랭카스터 가문의 후계자라는 타이틀과 더불어 "정복왕"으로써 이전 국왕을 무찌르고 왕위를 얻은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명분 하나를 더 얻기 위해서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합니다. 요크 가문의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는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그의 후손들에게 랭카스터와 요크 가문의 왕위계승권리를 모두 부여해서 통합을 이룰수 있게 한것이었죠.


요크의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4세의 딸, 헨리 7세의 왕비, 헨리 8세의 어머니

요크가문의 상징인 흰장미를 들고 있습니다.


헨리 7세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의 사이에서 여러아이를 낳았습니다. 그중 성인으로 성장한 아이들은 장남인 아서와 차남인 헨리, 그리고 두 딸인 마거릿과 메리만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중 장남인 아서는 카스티야의 카타리나와 결혼했었지만 부모보다 일찍 사망했고 그의 아내였던 카타리나는 그의 동생인 헨리와 결혼했었으며 그녀가 바로 유명한 헨리 8세의 첫번째 아내인 캐서린 왕비였습니다.

마거릿은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4세와 결혼했었으며 이때문에 마거릿의 손녀인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가 후에 잉글랜드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했던 기계가 됩니다. 또 남편이 죽은후 재혼한 후손을 통해서 메리 스튜어트의 두번째 남편이 되는 단리경 역시 그녀의 후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메리 스튜어트와 단리경의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헨리 7세의 뒤를 이은 인물은 바로 여섯아내들로 유명한 헨리 8세입니다. 그의 시기 잉글랜드는 더 발전적이었으며 잘생기고 능력있고 똑똑한 국왕에 대해서 모두들 열광하죠. 하지만 헨리 8세는 모두가 다 아는 복잡한 정치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첫번째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서 온갖 일을 했으며 결국은 수장령까지 내리죠. 게다가 그렇게 이혼하고 결혼한 두번째 아내 역시 간통죄로 몰아서 처형했으며 세번째 아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지만 일찍 죽자 외교를 위해서 네번째 아내를 맞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서 헤어졌으며 열정적으로 반해서 결혼했던 다섯째 아내 역시 간통죄로 처형합니다. 결국 여섯째 아내를 맞이한 뒤에 어느정도 평온하게 지내다가 결국 사망했었습니다. 사실 헨리 8세가 이런 상황에 몰린것은 그에게 적자 아들이 부족해서였습니다. 캐서린과의 사이에서는 딸인 메리만 살아남았었죠. 또 두번째 아내인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도 딸인 엘리자베스만 살아남았구요. 세번째 아내인 제인 시무어와의 사이에서 아들 에드워드 6세를 얻습니다만 제인 시무어는 일찍 사망했고 이후 아내들과의 사이에서는 자녀를 얻을수 없었습니다.



헨리 8세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비슷한 모습의 어린시절 초상화를 올릴려다가 그냥 유명한 한스 홀바인의 그림을 넣기로 했습니다. -0-;;;;



헨리 8세가 죽은뒤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즉위했지만 그는 그리 오래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톨릭교도인 누나 메리가 즉위할것을 우려해서 그는 친척이었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즉위 음모를 묵인해줬습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헨리 8세의 누이동생이었던 메리 튜더가 첫번째 남편인 프랑스 국왕이 죽은뒤 재혼한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자녀로 메리 튜더의 외손녀였습니다. 헨리 8세는 메리 튜더의 자녀들에 대한 왕위계승권리에 대해서 자신의 자녀들보다는 뒤지만 인정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제인 그레이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여왕으로 즉위시키려했었죠.



에드워드 6세


하지만 헨리 8세의 장녀였던 메리는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을 두고보지 않았으며 많은 이들이 메리를 지지했기에 결국 메리가 국왕으로 즉위하고 제인 그레이를 처형하게 됩니다. 열렬한 가톨릭 교도였던 메리는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리려고 했으며 이에 대해서 강경한 수단까지 썼기에 "블러디 메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녀는 친척이었던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와 결혼했었습니다만 그와의 사이에 후손은 없었습니다.



메리 여왕


언니인 메리 여왕이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메리의 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잉글랜드는 복잡한 상황이지만 대외적으로는 힘을 키우는 시기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특히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는데 이것은 그녀의 치세동안 후계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오래도록 자신의 결혼을 외교 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했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늙어가자 그녀의 후계자에 대해서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될것이 분명해지게 되었습니다.왜냐면 제임스 6세의 부모는 모두 엘리자베스 여왕의 고모였던 마거릿 튜더의 후손이었으며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할만한 혈연적 관계가 있었고 결정적으로 잉글랜드 왕위에 오를만한 인물이 제임스 6세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


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은뒤,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되면서 잉글랜드에서 스튜어트 왕가가 통치하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