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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의 인판타들...(16)블란카 산체스 : 산초6세의딸 (첫번째)

엘아라 2020. 1. 2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오랫만에 하니까 얼마나 낯선지 말입니다.


나바라의 인판타들...(16)블란카 산체스 : 산초6세의딸 (첫번째)




나바라의 블란카

상파뉴 백작부인

Blanche of Navarre 

(?–1229) 



나바라의 블란카는 나바라의 국왕 산초 6세와 그의 아내인 카스티야의 산차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언니인 베렌겔라는 후에 잉글랜드의리처드 1세와 결혼했었죠.


1199년 블란카는 상파뉴의 백작이었던 테오발드(티보) 3세와 결혼합니다. 그녀는 그보다 두어살정도 많았다고 합니다. 상파뉴 백작이었던 티보 3세는 상파뉴 백작이었던 앙리 1세와 그의 아내인 프랑스의 마리의 아들이었습니다. 티보 3세의 외할아버지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였으며 외할머니는 그의 첫번째 아내인 엘레오노르 다키텐이었습니다. (언니는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며느리고, 블란카는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외손자며느리인것입니다. -0-;;)티보 3세는 원래 형인 앙리2세가 있었지만 앙리가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1197년에 그의 뒤를 이어서 상파뉴 백작이 되었다고 합니다.1198년 4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자, 상파뉴 백작을 비롯한 프랑스 귀족들 역시 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려했으며 상파뉴 백작은 프랑스쪽 기사들의 리더로 선출되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201년 그는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죠. 



상파뉴 백작 티보 3세의 씰



남편이 죽었을때 블란카는 임신중이었습니다. 첫아이인 마리는 아마 유아기에 사망한것으로 추정되는데 아이의 아버지인 티보3세보다 먼저 사망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블란카는 아들인 티보 4세를 낳았습니다. 블란카의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상파뉴 백작이 되었으며 블란카는 아들의 섭정으로 아들이 성인이 될때까지 아들이 상속받은 지역을 통치하게 됩니다.


블란카가 상파뉴의 섭정으로 있던 시기는 그다지 평온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티보 3세의 형이었던 앙리 2세는 엄청난 빚을 물려줬었기에 블란카는 이 문제로도 골치아프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영지를 중간에 국왕에게 팔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상파뉴 백작령에 대한 복잡한 상속문제 역시 블란카를 힘들게 했었습니다.


상파뉴 백작으로 블란카의 시아주버니였던 앙리 2세는 예루살렘의 여왕이었던 이사벨라와 결혼해서 세명의 딸을 얻었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없었고 예루살렘과 프랑스는 멀리 떨어져있었기에 상파뉴 백작령은 동생인 티보 3세에게 돌아간 것이었죠. 그리고 티보 3세가 일찍 사망하고 그의아들이 상파뉴 백작령을 상속받자 당연히 이전의 앙리 2세의 딸들은 자신들에게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특히 예루살렘의 상속권과 거리가 좀더 멀었던 막내딸인 필리파가 상파뉴 출신의 귀족이었던 에라드 드 브리엔 Erard de Brienne-Ramerupt가 결혼하면서 둘은 상파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에라드 드 브리엔은 백부가 브리엔 백작이긴 했지만 그는 영지 없는 기사였으며 아마도 이것이 상파뉴 백작령의 상속권을 가진 필리파와 결혼한뒤 상파뉴 백작령에 대한 상속을 주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에라드 드 브리엔의 씰


결국 1216년 상파뉴의 계승권리를 둘러싸고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여기에는 에라드 드 브리엔의 친가이기도 한 브리엔 백작 가문이 연결되게 되죠. 에라드와 필리파는 1216년 프랑스로 왔으며 국왕에게 체포되지만 도주해서 상파뉴로 가서 자신의 지지세력을 모으게 됩니다. 물론 블란카는 남편인 티보 3세와 자신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티보 4세가 상파뉴 백작으로 프랑스 국왕의 봉신임을 인정받은 문서는 물론, 주변 귀족들에게 충성을 받은 문서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용이 없었으며 상파뉴 지방은 결국 에라드 드 브리엔과 필리파 드 상파뉴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티보 4세와 그의 어머니인 섭정 블란카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죠.


특히 상파뉴 지방에서는 블랑카에게 불만을 품었던 인물들이나 아니면 상위 군주인 상파뉴 백작에게 불만을 품은 이들이 에라드 드 브리엔을 지지했으며 이것은 블란카가 수세에 몰리는 원인이 됩니다. 게다가 상파뉴 계승전쟁은 원래 지역문제였지만 상파뉴의 백작의 상위 군주인 프랑스 국왕이나 부르고뉴 공작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마저 개입하는 문제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프리드리히 2세에 적대적이었던 로렌의 공작이 개입하면서 더 문제가 복잡해지게 되죠. 


하지만 블란카를 지지하는 인물들이 훨씬 더 강력한 인물들이었을뿐만 아니라 교황 역시 블란카와 그녀의 아들인 티보 4세를 지지했었기에 결국 점차 블란카와 그녀의 아들에게 유리하게 일이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1222년 최종적으로 티보 4세의 사촌이었던 필리파가 자신의 계승권리를 포기하므로써 승리를 거두게 되죠.



상파뉴의 티보 4세

블란카의 아들


1222년 승리를 거둔뒤 블란카는 아들인 티보 4세가 성인이 되어서 직접 통치할 나이에 이르게 되자 수도원으로 은퇴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정치적 삶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