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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의 인판타들...(13) 산차 그라세스 : 그라시아 라미레스의 딸

엘아라 2019. 12. 1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자료없는데 그냥 막합니다. -0-;;;;;


나바라의 인판타들...(13) 산차 그라세스 : 그라시아 라미레스의 딸



산차 그라세스

Sancha (1148–1176),


산차 그라세스는 나바라의 국왕이었던 그라시아 라미레스와 그의 두번째 아내인 카스티야의 우라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라시아 라미레스는 아내인 마르거리트 드 레이글이 죽은뒤 우라카와 재혼한 것이었습니다.


카스티야의 우라카는 레온의 국왕 알폰소 7세와 그의 정부였던 곤트라도 페레스라는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딸이었습니다. 곤트라도 페레스는 아스투리아스의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의 여성으로 1132년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이었던 알폰소7세의 정부가 되었으며 1133년 그의 딸인 우라카를 낳았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라시아 라미레스


그라시아 라미레스와 카스티야의 우라카의 결혼은 두 나라간의 동맹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라카는 1144년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한것이었고 그라시아 라미레스는 알폰소 7세의 사생아 딸과 결혼한 것이었죠. 그라시아 라미레스가 우라카와 결혼했을때 그의 둘째딸인 마르가리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재혼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고 합니다.재미난 것은 그리고 후에 동맹을 위해서 그라시아 라미레스의 딸인 블란카가 카스티야의 우라카의 남동생인 레온의 산초 3세와 결혼하기도 합니다.




카스티야와 레온의 알폰소 7세

산차의 외할아버지


산차 그라세스는 1148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겨우 2살때 아버지인 그라시아 라미레스가 사망했었죠. 그녀의 어머니인 우라카는 남편이 죽은뒤 고향으로 돌아갔었습니다. 아마도 나바라의 공주였던 산차는 첫결혼이 바스크 귀족과 결혼인것으로 봐서 아마도 이복오빠의 궁정에서 자라났을 듯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왕위계승자도 아니었고 어머니도 없었기에 그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 아닐듯합니다.


산차 그라세스는  1162년 베아른의 자작이었던 가스통 5세와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산차는 그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으며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가버렸다고 합니다. 아마도 남편이 수도원으로 들어갔기에 그녀의 상태는 애매해졌을 것입니다.



베아른 자작의 문장


산차는 이후 페드로 만리케스 데 라라와 재혼했다고 합니다. 라라 가문은 카스티야의 유력 귀족가문중 하나였으며 페드로 만리케스 데 라라는 군인으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산차는 나바라의 공주였을뿐만 아니라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의 외손녀이기도햇엇습니다. 이런 그녀의 혈통은 아마도 카스티야의 유력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페르도 데 라라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성이 되었을 듯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산차가 페드로와 결혼했을때 그녀의 첫남편인 가스통이 여전히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것은 복잡한 결혼문제로 발전했고 1170년 산차의 첫번째 남편이 죽은뒤, 산차와 페드로가 교회에 많은 기부를 하는 기록으로 봐서 아마도 보속을 위한 기부였을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둘은 결국 1172년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라라 가문의 문장


재미난 것은 산차의 이복 언니인 블란카의 아들인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는 어려서 부모를 잃었으며 섭정이 필요했는데 결국 승리한 쪽은 이 라라 가문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미성년인 알폰소 8세를 지원한 인물중 하나가 바로 외삼촌이었던 나바라의 산초 4세였으며 이런 관계는 산차가 라라 가문으로 시집가는 중요한 요인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할수 있을듯합니다.


산차와 페드로와의 사이에서는 세명의 아들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