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두 왕의 아내, 두 왕의 어머니 : 노르망디의 에마, 잉글랜드의 왕비(14) 크누트의 죽음과 잉글랜드 왕위계승문제

엘아라 2020. 1. 1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오늘도 새벽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ㅠ.ㅠ

진짜 삶이 피폐해지는 느낌이예요..ㅠ.ㅠ 빨리 새해특집을 끝내고 좀 쉬면서 정신차려야겠습니다. 흑


[새해특집]두 왕의 아내, 두 왕의 어머니 : 노르망디의 에마, 잉글랜드의 왕비(14) 크누트의 죽음과 잉글랜드 왕위계승문제


크누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제국에 대한 계승문제가 발생하게 만듭니다. 크누트의 확고한 후계자는 에마의 아들인 하르사크누트였습니다. 크누트는 그를 덴마크로 보내서 덴마크에서 자라도록 했었습니다. 특히 하르사크누트는 고모와 고모부인 아스트리드와 울프Ulf의 손에 자라났었다고 합니다. 크누트가 죽었을때 하르사크누트는 덴마크에 있었으며 덴마크에서 그는 덴마크의 왕위를 이었지만 덴마크내의 문제 때문에 잉글랜드로 올수 없었습니다.



하르사크누트

에마의 아들


크누트의 다른 아들인 스웨인(스베인)은 아버지 생전에 노르웨이의 국왕이 되었었지만 노르웨이의 마그누스 1세에 의해서 왕위에서 쫓겨나야했으며 왕위에서 쫓겨난 1035년경에 사망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보다 일찍 사망했을 것입니다. 스웨인이 죽은뒤 아들의 섭정으로 노르웨이에 갔었던 노샘프턴의 앨프기푸는 잉글랜드로 돌아왔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녀의 작은 아들인 해롤드는 잉글랜드에 있었으며 해롤드는 잉글랜드를 얻을 기회를 얻게 됩니다.



"토끼발" 해롤드

크누트와 노샘프턴의 앨프기푸의 아들

하르사크누트의 이복형



크누트가 죽은뒤 에마는 왕비로써 아마도 아들이 돌아올때까지 권력을 장악하려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생전에 매우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왕의 부재는 그녀에게 치명적인것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핵심 귀족들은 "전사"이자 "지도자"인 남성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에마는 그들의 지도자가 될수는 없는 사람이었죠. 그리고 귀족들의 눈에는 크누트의 아들인 해롤드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비록 에마의 아들이 정식 왕위계승자였다고 하지만, 하르사크누트는 언제 잉글랜드로 돌아올수 있을지 알수 없었습니다. 반면 해롤드는 당장 잉글랜드에 있었죠. 게다가 해롤드는 크누트의 첫번째 아내의 아들이었으며 하르사크누트의 형이기도 했었습니다. 바이킹의 관점에서 보면 해롤드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귀족들은 하르사크누트와 해롤드 헤어풋을 지지하는 편으로 나뉘게 됩니다. 핵심귀족중 웨식스 백작이었던 고드윈(후에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는 해롤드 고두윈선의 아버지)은 에마와 하르사크누트를 지지했었습니다. 하지만 또다른 핵심 귀족이었던 머시아의 백작 레오프릭은 해롤드와 그의 어머니인 노샘프턴의 앨프기푸를 지지했었습니다.이런  상황은 잉글랜드가 결국 두개의 편으로 분열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참회왕" 에드워드와 함께 있는 레오프릭

레오프릭은 "고디바"초콜렛으로 잘 알려진 레이디 고다이바 이야기속의 그 세금 많이 거뒀던 남편입니다.-0-;;



해롤드는 결국 하르사크누트가 없는 동안 잉글랜드의 국왕이 됩니다. 하지만 하르사크누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여전히 있었으며 특히 에마는 아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전면에 나서서 노력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암묵적으로 나라가 나뉘는 계기가 됩니다. 해롤드가 왕위에 올랐지만 하르사크누트를 지지하는 인물들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는 해롤드를 지지하거나 하르사크누트를 지지하거나 아니면 둘다를 수용하는 쪽으로 나뉘었고 이것은 사실 나라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에마는 이때 하르사크누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대비"로써 정치적 노력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녀는 죽은 남편의 권력을 장악하려했으며 또한 여러가지 외교적 노력을 하려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딸인 군힐다의 결혼이었습니다. 군힐다는 1020년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아들이었던 하인리히(후에 황제 하인리히3세)와 결혼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독일로 갔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정치적 문제로 미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035년 하인리히와 군힐다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성사되고 이듬해인 1036년 군힐다가 하인리히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전에 미적대던 결혼이 이렇게 정해진것은 아마도 하르사크누트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추정할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에마는 딸의 결혼식에 갈수 없었는데 그녀는 잉글랜드 내에서 여전히 부재중인 아들 하르사크누트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군힐다

에마와 크누트의 딸

황제 하인리히 3세의 첫번째 아내



이런 복잡한 상황에 또 다른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리를 가지 사람들이 잉글랜드로 오게 됩니다. 바로 에마의 아들들이었던 에드워드와 앨프레드였습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이들이 온것은 잉글랜드로 돌아오라는 어머니 에마의 편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조언자와 의지처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죠. 하지만 에마의 책에 따르면 이 편지는 거짓으로 해롤드가 보낸 것이었다고 합니다. 해롤드는 에마를 괴롭히기 위해서 위해서 에마의 아들들을 잉글랜드로 유인했다는 것입니다. 


에마가 편지를 보냈는지, 아니면 해롤드가 거짓으로 보낸것인지 아니면 편지 자체가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져있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잉글랜드의 복잡한 상황은 에마의 아들들인 에드워드나 앨프레드가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왕위를 다시 노릴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드워드와 앨프레드는 잉글랜드로 향하게 됩니다.



에마의 아들 에드워드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