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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7) 앙주 가문 : 예루살렘 왕가

엘아라 2019. 11. 2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플랜태저넷 가문 바로 할려니까 이 예루살렘쪽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이쪽먼저 해볼까합니다.


유럽의 통치 가문들...(7) 앙주 가문 : 예루살렘 왕가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첫번째 아내가 죽은뒤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었고 이때 예루살렘의 국왕 보두앵 2세의 눈에 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보두앵 2세의 딸인 멜리장드와의 결혼을 제안받게 되죠. 풀크 5세는 앙주로 돌아와서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조프리와 잉글랜드의 상속녀인 마틸다와의 결혼을 결정했고 아마 이때 영지의 상속에 대해서도 정리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으로 떠나서 멜리장드와 결혼했습니다.


장인인 보두앵 2세의 사망후 아내의 권리로 예루살렘의 국왕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만 사실 예루살렘 왕국의 신하들 눈에는 풀크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 국왕에 대한 반감을 갖는 많은 신하들처럼 행동했었습니다. 그리고 풀크의 아내인 멜리장드 역시 이에 동조했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기존의 예루살렘 왕국의 세력과 풀크 간의 다툼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풀크는 그의 아내인 멜리장드와도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게 되었죠. 이런 위태위태한 상황은 풀크가 사냥을 갔다가 낙마하는 사고를 당해서 사망하면서 끝나게 됩니다. 비록 남편과 정치적 견해로 사이가 나빴지만 멜리장드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었다고 합니다.



플크와 멜리장드


풀크5세는 멜리장드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인 보두앵과 아모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보두앵은 아버지가 죽은뒤 보두앵 3세로 어머니와 함께 예루살렘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모자는 결국 권력때문에 다투게 됩니다. 보두앵이 미성년 시절에 멜리장드의 통치는 당연해보였습니다만 보두앵3세가 성인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죠. 멜리장드는 예루살렘의 상속녀였지만 당대 많은 통념들처럼 그녀에게 남편이나 성인이 된 아들이 있다면 그 통치권을 그들에게 넘겨야한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어쨌든 보두앵 3세는 어머니에게 왕위를 요구했으며 당연히 멜리장드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복잡한 상황을 거쳐 모자는 내전을 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멜리장드가 패배했고 보두앵은 예루살렘 왕국의 통치권을 얻게 외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인 멜리장드가 죽은지 2년후인 1163년 보두앵 3세 역시 후계자 없이 사망했고, 동생인 아모리가 그 뒤를 이어 예루살렘의 국왕이 됩니다.



멜리장드와 아들 보두앵 3세


아모리는 어머니 생전에 에뎃사의 백작 조슬랭 2세의 딸인 아녜스와 결혼하려했었습니다만, 예루살렘의 대주교가 둘의 고조부중 한명이 같다는 이유로 근친혼임을 들어 반대했었다고 합니다. 결국 대주교가 죽고난뒤인 1157년에 둘은 결혼했었다고 합니다. 둘사이에서는 세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딸인 시빌라와 아들인 보두앵만이 성인으로 성장했었습니다. 이후 아모리는 형인 보두앵3세가 죽은뒤 예루살렘의 왕위를 잇게 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그의 아내인 아녜스가 예루살렘의 Queen이라는 지위에 적합하지 않가고 여겼으며 결국 아모리 역시 이를 받아들여 아녜스와 헤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둘의 자녀인 시빌라와 보두앵의 왕위계승권리를 인정받았으며 아녜스 역시 이전의 다양한 지위와 권한도 인정받았었다고 합니다. 아녜스와 헤어진뒤 아모리는 커져가는 이슬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비잔틴 제국과의 동맹을 원하게 되었으며 비잔틴의 공주를 아내로 맞길원합니다. 비록 비잔틴 황제의 딸과 결혼하지는 못했지만 황제의 후손이자 황제의 조카의 딸이기도 했던 마리아 콤네나와 결혼했으며 둘사이에서는 딸인 이사벨이 태어나게 되죠. 아모리는 1174년 이질로 사망했고 그의 뒤는 아들인 보두앵이 보두앵 4세로 즉위합니다.



아모리의 죽음과 보두앵 4세의 즉위


보두앵 4세는 어린시절 나병에 걸린것으로 알려져있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후손을 얻을수 없을 것이라 여겨졌고 이에 두 누이들인 시빌과 이사벨이 유력한 왕위계승후보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왕위계승문제는 안그래도 강성해지는 이슬람 세력을 막기 거버웠던 예루살렘 왕국에 더욱더 큰 타격을 주게 되죠. 보두앵 4세는 시빌을 몬페라토 후작의 장남이었던 굴리엘모와 결혼시켰습니다. 아마도 그가 어머니쪽을 통해서 프랑스의 국왕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사촌인점이 중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혼 다음해인 1177년 굴리엘모가 말라리아로 사망했으며 남편이 죽은뒤 시빌은 아들인 보두앵을 낳았습니다. 이후 보두앵4세는 시빌을 프랑스 출신의 귀족이었던 기 드 뤼지냥과 결혼시키게 됩니다. 야심가이 많은 뤼지냥 가문 출신인 기는 아내인 시빌이 강력한 왕위계승자임을 들어서 예루살렘의 정치에 나서게 됩니다만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이미 포로로 받아들인 무슬림들을 잔혹하게 살해한다던가 협약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대상들을 공격하는 등의 일을 했기에 보두앵은 그를 정치 일선에서 배제하려합니다. 하지만 기는 이에 반발하고 아내인 시빌을 데리고 하사받은 자신의 영지로 가버립니다. 아마도 결국 왕위가 시빌에게 돌아올것이라 여겼기에 아내만 있으면 된다고 여겼던듯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보두앵 4세가 조카인 보두앵 5세를 왕위계승자로 지정했지만 친누이였던 시빌은 왕위계승에서 배제하려했던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나병을 앓는 것을 알게된 보두앵 4세



보두앵 4세가 사망하고 보두앵 5세가 미성년으로 즉위합니다만 그는 10살도 되지 않아서 사망하면서 다시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에 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정당한 왕위계승자인 보두앵 5세의 어머니였던 시빌이 자신의 계승을 주장합니다. 물론 그녀의 남편인 기 드 뤼지냥은 인기없는 인물이었으며 귀족들 역시 그 때문에 망설였지만 시빌은 귀족들에게 기 드 뤼지냥과 헤어지고 새남편을 얻겠다고 약속하고서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자 시빌은 자신의 말을 바꿔서 기 드 뤼지냥과 헤어지지 않고 그를 자신의 남편으로 예루살렘의 공동국왕으로 인정하게 되죠.



시빌과 기 드 뤼지냥의 결혼


하지만 이미 보두앵 4세 시기에 살라딘이 힘을 얻고 있던 시기였으며 능력이부족하지만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서 마음대로 행동했던 기 드 뤼지냥 같은 인물이 국왕이 되자 예루살렘은 더 힘들어졌고 결국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기 드 뤼지냥은 이미 이전에 포로가 되었으며 시빌도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포로가 되었지만 풀려나게 되죠. 그녀는 여전히 예루살렘의 여왕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통치에 대해서 반발하는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그녀의 첫번째 남편의 동생이었던 몬페라토의 콘라드가 형의 권리를 이어 자신이 예루살렘의 왕위를 이어야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이에 시빌의 새어머니였던 마리아 콤넨나가 동조했으며 이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자신의 딸이자 시빌의 이복여동생이었던 이사벨을 콘라드와 결혼시키기 까지 햇었습니다. 그리고 1190년 3차 십자군전쟁을 앞두고 십자군들과 함께 있었던 시빌과 그녀의 두딸은 병영을 휩쓴 전염병에 걸려서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위는 시빌의 이복여동생인 이사벨에게 돌아가게 되죠. 물론 기 드 뤼지냥은 자신이 예루살렘의 국왕이라고 주장했었고 십자군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 국왕이나 잉글랜드 국왕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 보다 이사벨이나 그녀의 남편인 콘라드쪽을 더 신뢰했고 결국 그들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됩니다.



이사벨과 콘라드


이사벨은 보두앵 4세에 의해서 첫번째 결혼을 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기 드 뤼지냥과 시빌을 결혼시키면서 기 드 뤼지냥을 반대하는 쪽을 설득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두앵 4세와 보두앵 5세가 죽고 시빌과 기 드 뤼지냥이 권력을 잡으면서 상황은 더 꼬여갑니다. 이사벨의 새아버지와 어머니인 마리아 콤넨나는 몬페라토의 콘라드를 지지했고 딸인 이사벨을 그와 결혼시키려하죠. 그래서 마리아 콤넨나는 딸이 미성년일때 보두앵 4세의 강요로 결혼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결혼을 무효화시킵니다. (교회법상 미성년의 강제 결혼은 불법입니다. 물론 정치적목적으로 그래놓고도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이렇게 필요하면 또 그랬다고 주장하기도 했었습니다. ) 그리고 이사벨은 콘라드와 결혼했고 결국 콘라드는 예루살렘의 국왕이 되죠. 하지만 콘라드는 국왕으로 대관하기 전 암살당했었죠.

콘라드가 죽은 직후, 예루살렘 왕위 문제를 두고 다투었던 인물중 또하나였던 상파뉴의 앙리가 옵니다. 그는 프랑스의 국왕과 잉글랜드 국왕의 조카였기에 그가 예루살렘의 국왕으로 적당하죠. 결국 콘라드가 죽자마자 이사벨은 이 상파뉴의 앙리와 결혼해야했었습니다. 이때 그녀는 임신중이었으며 첫 딸인 몬페라토의 마리아가 1192년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상파뉴의 앙리 사이에서 이사벨은 세명의 딸인 마르거리트,알릭스,필리파를 낳았죠. 하지만 1197년 상파뉴의 앙리는 사고로 인해서 창문에서 떨어져서 사망하게 됩니다.

세번째 남편이 죽은뒤 이사벨은 마지막으로 재혼하는데 상대는 키프러스의 아모리로 형부였던 기 드 뤼지냥의 동생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사벨은 아모리와의 사이에서 두 딸인 시빌과 멜리장드를 낳았습니다.


이후 예루살렘의 왕위계승권리는 이사벨의 딸들의 후손에게로 이어지게 됩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하는 예루살렘의 여왕 욜랑드(이사벨 2세, 이사벨 1세의 외손녀)


사실 예루살렘이 무슬림에게 점령당한뒤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는 점점 더 줄어들었고 외국 세력(십자군)의 세력에 의존해야했었습니다만 예루살렘의 국왕이라는 지위는 매우 가치있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문에 많은 가문에서 혈연적 연줄을 이용해서 "예루살렘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썼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