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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통치 가문들...(6) 샤토됭 가문 : 앙주 백작 가문

엘아라 2019. 11. 22. 08: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플랜태저넷 가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앙주 백작령을 통치했던 시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합니다.


유럽의 통치 가문들...(6) 샤토됭 가문 : 앙주 백작 가문


가티내 백작인 조프리 2세가 일찍 사망하고 어머니인 에멩가르드가 부르고뉴 공작과 재혼한뒤 조프리 2세의 두 아이들인 조프리 3세와 풀크는 외삼촌인 앙주 백작 조프리 2세의 궁정에서 성장했었습니다. 그리고 앙주 백작 조프리 2세는 자신의 지위에서 물러나서 수도원으로 가면서 조카인 조프리 3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고 그는 혈통을 바탕으로 앙주 백작이 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앙주 가문의 전통이라고 이야기되는 형제 간의 다툼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조프리 3세의 동생이었던 풀크 역시 자신의 상속분을 주장하면서 형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형제간의 싸움에서 승리한쪽은 풀크였죠. 그는 앙주 백작으로 풀크 4세가 되었으며 형을 오래도록 감금상태로 지내게 했었습니다. 이후 교황의 중재로 조프리 3세는 동생에게 사로잡힌지 28년만에 석방될수 있었다고 합니다만 곧 사망하게 되죠.



형인 조프리 3세를 사로잡아서 감금한 풀크 4세



풀크 4세 역시 앙주 가문의 전통이라는 형제간의 불화는 물론 부자간의 불화의 모습도 보여주게 됩니다. 그는 여러번 결혼했고 세명의 아내에게서 딸인 에멩가르드와 아들인 조프리와 풀크를 각각 얻었습니다. 재미난 사실은 풀크 4세의 마지막 아내이자 풀크 4세의 막내 아들인 풀크(후에 풀크 5세)의 어머니인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는 남편인 풀크 4세가 살아있었음에도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1세와 결혼하기 위해서 1092년 남편을 떠났으며, 역시나 배우자가 있었던 필리프 1세 역시 세아이를 낳아준 아내를 쫓아내고 그녀와 결혼했었습니다. 풀크 4세는 아내가 떠난것을 인정하지 않고 교황에게 중혼을 이유로 제소하기에 이르렀고 교황인 우르반 2세는 그를 파문하기까지 했었습니다. 



프랑스의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 그리고 감금된 필리프 1세의 아내인 홀란드의 베르타와 항의하는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의 남편인 앙주 백작 풀크 4세



이런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풀크 4세는 막내아들인 풀크를 좋아했으며 장남인 조프리보다 풀크에게 자신의 영지를 물려주고 싶어했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남편을 떠나 프랑스의 왕비가 된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 역시 자신의 아들이 앙주 백작령을 물려받길 바랬다는 것이었죠. 이것은 아마도 조프리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졌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성인이었으며 신하들의 지지를 얻을수 있을 만한 인물이었기에 풀크 4세는 그를 후계자로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특히 1103년 조프리는 아버지로부터 앙주의 통치자 자격을 인정받았으며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 지위를 얻게 되죠. 하지만 이것은 래가지 못했는데 1106년 반란을 진압하러 갔던 조프리 4세는 협상을 하러가던중 화살에 맞고 사망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그를 못마땅해했던 풀크 4세와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가 꾸민 음모일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조프리 4세가 사망했고 1109년 풀크 4세마저 죽은후, 앙주 백작령은 풀크 4세와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의 아들이었던 풀크 5세가 상속받게 됩니다. 풀크 5세는 다른 앙주 백작들처럼 노르망디 공작령 인근지역을 두고 노르망디 공작과 경쟁관계에 잇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노르망디 공작이자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1세를 적대하고 프랑스의 국왕인 루이 6세를 지지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1118년경 헨리 1세와 동맹을 맺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딸인 마틸다를 헨리 1세의 후계자였던 윌리엄 아델린과 결혼시키기로 했었습니다. 그리고 둘은 1119년에 결혼하죠. 재미난 것은 풀크의 어머니인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는 의붓아들인 루이 6세가 아니라 필리프 1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중 한명이 프랑스 국왕이 되길 바래서 헨리 1세와 돔맹을 맺으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풀크 5세가 헨리 1세와 동맹을 맺은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프랑스 국왕에 대한 견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딸이 결혼하던해에 그는 십자군전쟁에 참전하러 갔으며 아직 어린 아들만이 있던 앙주 백작령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동맹이 필요했었고, 아마 프랑스 국왕은 그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었던듯합니다. 그렇게이 이제까지 적이었던 헨리 1세와 손을 잡았던 것이었죠.



풀크 5세의 씰


1120년 화이트쉽난파사고로 윌리엄 아델린이 죽고난뒤 풀크 5세는 십자군전쟁에서 돌아와서 딸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합니다. 당연히 지참금 역시 다시 가지고 와야했지만 헨리 1세는 이를 거절했고 두 집안은 다시 갈등이 시작됩니다만 결국 풀크의 또다른 딸을 헨리 1세의 조카와 결혼시켜서 그 지참금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니다.그리고 나서 풀크는 다시 한번 십자군전쟁에 참전했었는데, 이때 예루살렘의 국왕이었던 보두앵 2세가 자신의 딸이자 후계자가 될 멜리장드를 풀크와 결혼시키려했죠. 이에 풀크는 앙주 백작령의 상황을 정리하러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으며, 이때 자신의 열다섯살 먹은 아들인 조프리를 헨리 1세의 유일한 상속녀였던 마틸다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했었습니다. 이 결정은 그의 손자인 앙리(헨리 2세)가 엄청난 영지를 상속받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훗날 "플랜태저넛"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되는 조프리는 잉글랜드의 상속녀인 마틸다와 결혼했으며, 영국 왕가의 시조가 되죠.(물론 평생 나이도,신분도 마누라보다 딸려서 무시당하고 살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풀크 5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보두앵 2세의 딸인 멜리장드와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서는 두 아들이 태어났고 이 두 아들 모두 예루살렘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풀크와 멜리장드의 결혼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