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29) 덴마크의 다우마 : 알렉산드르 3세의 황후(다섯번째)

엘아라 2019. 10. 3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29) 덴마크의 다우마 : 알렉산드르 3세의 황후(다섯번째)




덴마크의 다우마

러시아의 마리야 표도로브나 

알렉산드르 3세의 황후

Maria Feodorovna 

Princess Dagmar of Denmark

(26 November 1847 – 13 October 1928) 

1881년


1866년 9월 1일 다우마는 이제 러시아의 황태자가 결혼하기 위해서 덴마크를 떠나게 됩니다. 덴마크의 많은 이들이 이제 미래의 러시아 황후가 될 다우마 공주를 배웅하기 위해 나왔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에서 그녀는 시숙부가 될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에스코트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게 됩니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입성했을때 러시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환영받았다고 합니다.


다우마는 결혼하기 직전에 전통대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을 해서 정교회식 이름인 마리야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866년 11월 9일 (구력으로는 10월 28일)에 겨울 궁전에서 러시아의 황태자인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결혼해서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됩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마리야 표도로브나의 결혼식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러시아에서 많은 이들에게 호의적인 대접을 받게 됩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작고 아름다운 덴마크 공주가 단순무식한 황태자와 결혼한것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지기도 했었다고 합니다만 일단 그녀에 대해서 적대감이 아니라 호의를 보였었습니다. 게다가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매우 활기찬 여성으로 사람들과의 사교생활을 즐겼으며 자선사업등에도 열정적이었으며 러시아어를 배우고 러시아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그녀의 모습에 러시아 사람들이 호의적이 될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그녀의 반 독일감정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그다지 이해받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비록 어렵게 결혼한 사이였지만 마리야 표도로브나와 알렉산드르 3세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가정적으로 매우 행복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는 결혼후 정부를 두지 않았던 첫번째 로마노프 황제였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아내가 덴마크로 혼자 갈때면 늘 아내의 방문앞을 서성거리면서 아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어린시절 별명이 불독이었습니다.)



샤샤와 미니



결혼한 그해에 유산을 경험했던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결혼 2년후인 1868년 첫아들인 니콜라이를 낳습니다. 그후로 알렉산드르, 게오르기, 크세니아,미하일,올가를 낳게 되죠. 아이들에 대해서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아들들에 대해서 좀더 신경을 쓰는 어머니였기에 상대적으로 딸들과의 사이는 좀 멀었다고 합니다.



첫아이인 니콜라이와 함께 있는 알렉산드르 3세 부부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결혼후에도 자주 덴마크를 방문해서 친정식구들과 함께 만났었습니다. 특히 제일 친한 언니였던 알렉산드라와의관계는 좋았는데 이것은 둘의 남편들인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르 3세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두 나라 왕실이 독일-프로이센 왕실과 가까운 친척관계였음에도 반독일감정을 가지게 된것 역시 이들 자매의 영향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알렉산드라와 마리야 표도로브나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남편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정치 상황은 그녀가 행복해하면서 지내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위험했습니다. 특히 황실가족들은 테러의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를테면 겨울궁전의 식당에서 폭탄이 터진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황실가족들은 모두 기다리던 손님이 탄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식사시간이 30분정도 늦춰졌었으며 이때문에 가족들이 막 겨울궁전의 정문에 들어섰을때 폭탄이 터졌서 간신히 목숨을 구할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시어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가 죽은뒤 시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는 정부였던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기어이 귀천상혼했고 이것은 궁정내의 갈등상황을 고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야 표도로브나 역시 남편처럼 시어머니에게 따뜻한 감정이 있었기에 황제가 황후를 버리게 만든 여성이었던 유리예프스카야 공비를 그다지 곱게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황실 가족내의 문제와 복잡한 정치적 문제도 있었습니다.



유리예스프카야 공비와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들과 함께 있는 알렉산드르 2세


그리고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제일 비극적 상황에서 황후가 됩니다. 바로 그녀의 시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테러로 사망했던 것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