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진짜 길어지네요.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31) 덴마크의 다우마 : 알렉산드르 3세의 황후(일곱번째)
덴마크의 다우마
러시아의 마리야 표도로브나
알렉산드르 3세의 황후
Maria Feodorovna
Princess Dagmar of Denmark,
(26 November 1847 – 13 October 1928)
황태후가 된 마리야는 로마노프 가문내에서 더 강력한 존재가 됩니다. 사실 러시아에서 황태후는 황후보다 더 높은 지위였기에 아들인 황제와 정치적 파트너가 될수도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야는 아들인 니콜라이 2세가 유약한것에 걱정했으며 그의 통치 초기에 정치적인 조언자로 나서기도 했었습니다.
아들인 니콜라이 2세와 함께 있는 마리야 황태후
이 사진은 며느리인 알렉산드라 황후가 찍은 것입니다.
하지만 다 큰 자녀를 언제까지 곁에 둘수는 없는 문제였죠. 시간이 지나면서 마리야 황태후의 정치적 영향력은 좀더 약해졌으며 대신 니콜라이 2세의 아내인 알렉산드라의 영향력이 점차 더 커져갔습니다.
이것은 아마 황태후가 아들 부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아들 부부와 따로 떨어져 지내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가족내의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갈등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황후였던 알렉산드라는 황태후였던 마리야와 매우 대비되는 인물로 마리야가 활기차고 사교계를 이끌어가던 인물이었다면 알렉산드라는 수줍음많고 조용히 가족생활을 원하던 여성이었죠. 문제는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라같은 황후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아마도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며 황태후는 아들 부부와 떨어져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을 것입니다.
니콜라이 2세 부부와 손녀인 올가 그리고 두딸인 크세니아와 올가 그리고 외손녀인 이리나와 함께 있는 마리야 황태후, 마리야가 안고있는 아이가 올가이고 크세니아가 안고 있는 아이가 이리나입니다.
황태후가 된 마리야에게 가족들의 일은 여전히 많았죠. 둘째아들인 게오르기가 갑자기 죽었을때 그녀는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막내딸인 올가를 멀리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서 올덴부르크 공작과 결혼시켰지만 딸의 결혼이 매우 불행한것을 지켜봐야했었습니다. 올가는 남편과 이혼을 원했지만 황실에서는 절대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었고 그녀는 1차대전이 일어나고서야 남편과 헤어지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두번째 결혼때의 올가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마리야 황태후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러시아의 황태후로 살던 마리야 표도로브나의 삶은 이전과 그리 다르지는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삶을 바꾼것은 바로 1차 세계대전이었죠.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많은 문제가 발생했으며 이것은 러시아의 안위를 위협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라스푸틴 문제로 인해서 황제부부의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마리야는 며느리를 설득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며느리와의 불화로 인해서 더이상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지 않고 키예프로 떠나버리죠. 이 상황은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황태후가 살아남는 계기가 됩니다. 황태후는 혁명이 일어난뒤 키예프를 떠나 크림반도지역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황실에 충성스러운 백군들이 있었고 황태후와 그 주변 인물들을 보호하고 있었죠.
혁명후 잠시 가택 염금을 당했던 황태후와 그 주변 사람들
혁명의 와중에 황실가족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들이 알려지게 됩니다. 특히 황제 일가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은 금방 퍼져나갔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야는 이 소식에 대해서 인정하길 거부합니다. 그리고 러시아에 머물면서 아들이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겠다고 했죠. 하지만 그녀도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특히 마리야의 언니인 알렉산드라 왕비는 여동생이 죽게 내버려둘수는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라는 아들인 조지 5세에게 이모를 구하러 전함을 보내라고 줄기차게 요구했고 마리야에게 제발 러시아를 떠나 안전한 영국으로 오라고 설득했었습니다. 결국 영국이 보내온 전함을 타고 마리야와 주변 사람들은 러시아를 떠나 영국으로 가게 됩니다.
러시아를 떠난 마리야 황태후는 처음에는 언니인 알렉산드라와 함께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마리야에게는 언니와 머무는 것이 너무 힘든일일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둘다 당대 세계 최강의 나라의 군주의 부인이었었지만, 지금 알렉산드라는 여전히 영국 전 국왕의 왕비이자 현국왕의 어머니로 대접받고 사는 반면 그녀는 아들의 생사조차 확인할수 없는 망명객일뿐이었죠. 게다가 아마도 알렉산드라가 자신의 아들인 조지 5세와 함께 있는 것은 마리야 황태후에게 가슴아픈 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조지 5세는 사촌인 니콜라이 2세와 너무나 많이 닮았기에 조지 5세를 보면서 자연히 여전히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떠올릴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라와 마리야
결국 마리야는 영국을 떠나 고향인 덴마크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덴마크에서의 삶도 쉽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녀 역시 망명왕족들이 시달리는 만성적인 돈문제에 시달렸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고용인들을 그대로 두려했으며 뿐만 아니라 망명한 러시아 사람들도 도우려했었죠. 이것은 돈이 드는 일이었는데 러시아의 혁명으로 그녀의 수입은 거의 없었으며 조카인 크리스티안 10세는 그녀를 적극적으로 도우려하지 않았었습니다.
망명시기의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
1925년 언니 알렉산드라가 사망한뒤 마리야도 서서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했습니다. 그리고 1928년 사망하죠. 그녀는 죽을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자신을 남편곁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합니다만 그 유언이 실현되려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려야했습니다.
덴마크에 있던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의 묘
마리야 황태후가 죽은지 오랜 시간이 지난 2006년 덴마크의 여왕인 마르그레테 2세(황태후의 오빠인 프레데리크 8세의 증손녀)는 러시아의 대통령인 푸틴과 황태후의 이장에 합의를 합니다. 그리고 황태후가 아름다운 신부로 덴마크를 떠났던 140년후인 2006년 황태후의 시신은 다시 한번 남편인 알렉산드르 3세 곁으로 가기 위해서 덴마크를 떠나게 되죠. 2006년 9월 28일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생전의 유언대로 사랑하는 남편 알렉산드르 3세 곁에 묻히게 됩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남편 알렉산드르 3세 곁에 있는 마리야 표도로브나의 묘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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