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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246) 앨리스 케펄 : 에드워드 7세의 정부 (세번째)

엘아라 2019. 9. 3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정부들과 그 후손들...(246) 앨리스 케펄 : 에드워드 7세의 정부 (세번째)




앨리스 프레데리카 케펄

Alice Frederica Keppel née Edmonstone;

(29 April 1868 – 11 September 1947) 



에드워드 7세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앨리스 케펄은 그의 곁에서 머물면서 간호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에드워드 7세의 죽음을 막을수는 없었죠. 특히 앨리스 케펄은 에드워드 7세가 죽기 직전 쫓겨난 이야기가 유명했습니다. 에드워드 7세는 앨리스를 보는 것을 원했기에 알렉산드라는 마지 못해서 남편에게 정부를 보여주게 됩니다. 이때 앨리스는 죽어가는 국왕을 마지막으로 봤지만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알렉산드라는 바로 앨리스 케펄을 쫓아냈는데 앨리스 케펄은 경비에게 거의 끌려나갔다고 합니다. 앨리스 케펄은 진정하려고 했지만 스스로를 억제하지 못햇고 히스테릭하게 울어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에드워드 7세의 죽음은 일명 "에드워드 시대"라고 불렷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이엇던 앨리스 케펄의 시대도 끝이나는 것을 의미했구요. 에드워드 7세의 뒤를 이은 조지 5세와 메리 왕비는 20세기초 흔들리는 영국 왕가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수많은 정부들과 그녀들과의 "스캔들"을 참을수 없었죠.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의 대표적인 인물중 하나였던 앨리스 케펄 역시 용납할수 없었습니다. 결국 앨리스 케펄은 더이상 궁정행사에 초대받지 못했고 이것은 사교계에서 큰 타격을 입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조지 5세와 메리 왕비


앨리스 케펄과 그녀의 남편인 조지 캐펄은 더이상 영국에 머무는 것이 힘들다는 판단을 했으며 가족들은 외국으로 떠나야했습니다. 잠시 돌아오기도 했었으며 1차대전때는 많은 상류층 여성들처럼 앨리스 역시 야전병원을 설립하는데 참여햇고 여기에서 일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1차대전이후 영국 왕가는 더욱더 생존을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었기에 앨리스가 설 자리는 더욱더 없었습니다. 결국 앨리스는 남편과 함께 1925년 이탈리아로 완전히 거주지를 옮기게 됩니다. 이탈리아에서 오래도록 거주했던 앨리스 케펄과 그녀의 남편은 2차대전때 잠시 영국으로 돌아오기도 했었습니다만 결국 이탈리아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앨리스 캐펄과 그녀의 남편인 조지 캐펄의 묘


앨리스 케펄은 1936년 에드워드 8세가 심슨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한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요즘은 내때보나 낫네"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옵니다. 또 다른 이야기중 하나는 이탈리아에 있었던 앨리스 케펄의 집은 후에 관광지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탈리아의 관광가이드는 이 집을 "빅토리아 여왕의 사랑을 받았던 케펄 가문 사람의 집"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0-;;;;;)


재미난 연결고리 하나는 앨리스 케펄의 딸인 소니아 케펄은 현재 웨일스 공의 부인인 콘웰 공작부인 카밀라의 외할머니라는 것입니다.카밀라는 웨일스 공의 오랜 정부였으며 찰스와 다이애나가 이혼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고 알려졌었기에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좀 뒷담화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한때 기억하기로는 소니아가 에드워드 7세의 딸이라는 소문도 있었던것 같은데 말입니다. --;;)




웨일스 공 찰스와 그의 아내인 콘웰 공작 부인 카밀라

사실 웨일스 공의 정식 아내이기에 카밀라는 웨일스 공비(Princess of Wales)라는 칭호를 쓸수 있습니다만 이 칭호를 쓰면 아마 영국민들이 벌떼처럼 일어날수 있었기에 이 칭호를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웨일스 공은 콘웰공작이기도 했기에 카밀라는 콘웰 공작 부인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살아있는 사람은 별로 관심이 없는데 워낙 스캔들로 유명한 인물들이라서 말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