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레온-카스티야를 먼저 하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읽다가 족보관계에 지쳐서 차라리 아라곤부터하자 싶었는데 보니까 아라곤 왕국은 또 나바라에서 분리된곳이더라구요 아하하..-0-;;;
역시 모르는 곳은 힘듭니다. ㅠ.ㅠ
어쨌든 그래서 나바라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진짜 이동네는 족보가 정리가 안되서 너무 힘들어요. 흑
나바라의 인판타들....(1) 들어가면서
나바라 왕국은 현재 에스파냐와 프랑스에 걸친 왕국으로 바스크인이 중심으로 세운 나라였습니다. 위치는 피레네 산맥 서쪽 대서양을 따라서 있던 곳이었죠. 이곳은 나바라라는 이름이 아니라 원래는 팜플로나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었습니다만 산초 3세 이후 나라가 아라곤과 나누어지게 되면서 이후 나바라 왕국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나바라 왕국의 문장
나바라 왕국의 시작은 바로 601경에 성립되는 바스코니아 공작령입니다. 이 공작령은 프랑크 인들의 왕국이었던 메로빙거와 카롤링거 왕가가 통치하던 시기에 프랑크 왕국들에 영향을 받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들이 통치하던 시기의 많은 지역들처럼 이들도 역시 독립적 통치권한을 얻기를 바라고 행동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8세기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면서 훨씬더 복잡한 양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팜플로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바스크족 지역은 이슬람 세력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 살던 바스크 인들은 기독교도였지만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다툼에서 기독교 세력에 피해를 많이 입었으며 자주 이슬람 세력을 지지하는 행동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Roncevaux Pass 전투, 이 전투는 샤를마뉴의 군대를 바스크족이 공격한 전투로 샤를마뉴는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고서는 돌아가는 길에 바스크족이 이슬람 세력에 가담할것을 우려해서 팜플로나의 성벽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샤를마뉴의 군대가 바스크족의 도시들을 약탈하는 계기가 되죠. 결국 이렇게 되자 바스크인들은 샤를마뉴의 군대의 후미를 기습공격했었고 샤를마뉴는 큰 패배를 안게 됩니다. 이 사건은 후에 "롤랑의 노래"의 배경이 됩니다만 거기서는 같은 기독교도인 바스크족이 아니라 이교도를 공격했다고 나오죠.
나바라 왕국이 성립된 것에 대해서 전통적으로는 824년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바라의 첫국왕으로 전해지는 이니고 아리스타가 역시 프랑크 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라고 알려져있습니다. 이니고 아리스타(는 바스크족 출신으로 팜플로나 지방을 중심으로 왕국을 성립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팜플로나왕국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나이었으며,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는 지역이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믿었지만 이슬람세력에 세금을 냈었죠.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게 되면서 자연히 이슬람 세력과도 마찰을 빚기 시작합니다.
비록 이니고 아리스타가 나바라 왕국(팜플로나 왕국)의 기초를 다졌다고 하지만 이슬람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니고 아리스타의 아들이었던 가르시아 이니케스(라틴어로는 가르세아 에네코니스Garsea Enneconis)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인근의 기독교 세력과 연합해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게 됩니다. 이 당시 나바라는 아마도 이웃의 아스투리아스처럼 한명의 왕이 통치하는 국가라기 보다는 귀족들이 공동으로 이끌어가는 나라였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왜냐면 가르시아 이니케스의 아들인 포르툰 그라세스가 왕위에 올랐지만 귀족들에 의해서 물러나고 당시 나바라의 강력한 귀족중 한명이었던 산초 지메네스를 왕위에 올리게 되죠. 산초 지메네스의 아버지는 나바라의 강력한 귀족으로 거의 국왕과 같은 권한을 가진 인물이었던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니고 아리스타와 그 아들이 통치하던 시기에 산초의 아버지 역시 "팜플로나의 또다른 국왕"이라는 칭호로 언급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니고 아리스타
산초 1세가 즉위한 뒤 나바라 왕국은 지메네스 가문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산초 1세 시기 그는 주변의 레온과 연합을 했고 그 결과 아라곤 인근 지역을 차지한것을 확정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복잡한 국내 관계 때문에 주변의 기독교 국가인 레온이나 아니면 이슬람 세력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나바라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는 11세기로 바로 산초 1세의 현손이었던 산초 3세때였습니다. 그는 팜플로나를 중심으로하는 나바라 지역은 물론 아라곤 백작령을 통치했으며 결혼을 통해서 카스티야 백작령까지도 통치하게 됩니다. 나바라 역사상 가장 큰 영지를 가지게 되었지만 산초 3세는 죽을때 세아들들에게 각각 나바라,카스티야,아라곤 지역을 분리해서 상속합니다. 이후 팜플로나 왕국은 나바라와 아라곤 왕국으로 분리되게 됩니다. 물론 같은 가문이었기에 아라곤과 나바라는 한동안 연합하기도 했었습니다만 12세기 알폰소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국은 완전히 분리되게 됩니다. 알폰소 1세의 뒤를 이어 나바라의 국왕으로 선출된 가르시아 라마레스는 여전히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썼지만 그가 통치하는 지역은 나바라 지역으로 한정되었으며 특히 그의 아들인 산초 6세는 팜플로나 왕국이라는 칭호를 포기하고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칭호만을 쓰기 시작합니다.
산초3세
산초 6세의 아들인 산초 7세는 후계자를 두지 못했고 그 결과 나바라의 왕위는 산초 7세의 조카이자 산초 6세의 외손자였던 상파뉴 백작 티볼트가 물려받아서 나바라의 국왕 테오발도 1세가 됩니다. 이후 나바라는 프랑스와 좀더 연결고리가 커지게 됩니다. 특히 테오발도 1세의 아들들이 모두 남성후계자를 얻지 못했고 그의 손녀인 후아나가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결혼하면서 한동안 프랑스의 국왕들이 나바라 왕국의 국왕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필리프 4세의 아들들은 남성 후계자를 얻지 못햇고 이것은 잉글랜드와의 100년 전쟁을 시작하는 원인이 되었죠. 필리프 4세의 손녀인 조안(후아나)는 역시 살리카법때문에 프랑스 왕위는 얻을수 없었지만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권리로 나바라의 왕위를 이어받을수 있었죠. 하지만 후아나는 역시나 프랑스 왕가의 방계 가문 출신으로 후아나와는 육촌이었던 에브뢰 백작 루이의 아들인 필리프와 결혼합니다.
나바라의 후아나 2세 (프랑스의 조안)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의 국왕 루이 10세였습니다만 그녀는 숙부에 의해서 "살리카법"으로 프랑스의 왕위계승을 배제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바라 왕국의 계승권리는 그대로 이어받았기에 나바라의 여왕 후아나 2세가 되죠.
에브뢰 가문의 국왕들은 사실 프랑스의 국왕들이 나바라의 국왕을 겸하면서 직접 통치하지 않았던 시기와는 다른 통치모습을 보이면 호의적으로 평가 받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나쁜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후아나의 손자는 남성후계자가 없었으며 증손녀인 블란카가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블란카는 카스티야 왕가의 방계 가문 출신으로 아라곤의 인판타였던 후안과 결혼했었죠. 원래 후안에게는 형이 있엇기에 왕위를 아라곤의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 에상하지 못했지만 형이 죽고 왕위를 물려받아서 아라곤의 후안 2세가 되죠. 하지만 그는 아내인 블란카가 죽은뒤 아들인 후안에게 나바라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고 그 결과 아들과 내전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들인 카를로스는 아버지보다 먼저 죽으면서 나바라의 왕위게승문제가 복잡해졌는데 결국 나바라의 왕위는 블란카와 후안의 둘째딸인 레오노르가 물려받게 되죠.
아라곤의 후안 2세
그는 아내인 블랑카의 권리로 나바라를 통치했는데 아내가 죽고 난뒤에도 그 권리를 아들인 카를로스에게 물려주지 않았고 결국 내전을 해서 아들을 패배시켰습니다. 후안은 나바라를 완전히 합병하고 싶어했고 이 야망은 그의 아들인 페르난도 2세가 이어받았으며 결국 페르난도 2세의 외손자였던 카를로스(카를 5세)때 나바라의 일부를 완전히 합병하게 됩니다.
레오노르는 푸아 백작과 결혼해서 많은 아이들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레오노르의 이복동생이었던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과 결혼해서 두 나라는 하나의 나라가 되어서 거대한 왕국을 형성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나바라에 압력으로 다가왔었지만 나바라에는 단지 에스파냐만이 주변에 잇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역시 나바라의 영지를 탐내게 되죠. 게다가 레오노르는 장남의 후손에게 나바라의 영지를 물려주었지만 레오노르의 손자가 죽고 손녀인 카타리나가 왕위에 오르면서 레오노르의 다른 아들이 이런 계승에 반발하게 됩니다. 결국 주변의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왕위를 노리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내전까지 해야했기에 나바라의 상황은 복잡하게 됩니다. 특히 아내가 죽은뒤 카타리나의 사촌과 결혼했던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아내의권리로 나바라의 왕위를 가지려고 했습니다. 물론 나바라 내부에서는 이런 상황을 용납하지 않았고 계속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려는 노력을시도합니다.
나바라의 카타리나
결국 이문제는 카를 5세 시절인 1530년에 해결됩니다. 너무나 큰 통치 영지를 가지고 있었던 카를 5세는 아마도 나바라 문제까지 신경쓰기에는 물려받은 영지가 너무 컸었던듯합니다. 결국 나바라의 일부를 독립시켰고 카타리나의 아들인 엔리케가 나바라를 통치하게 되죠. 하지만 그는 역시 남성후계자를 얻지 못했고 그의 딸인 후아나가 나바라의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후아나는 프랑스 왕가의 방계 가문이었던 부르봉 가문 출신인 앙투안과 결혼했는데 그녀의 아들인 엔리케는 어머니로부터 나바라 왕국을 물려받았지만 아버지를 통해서는 프랑스 왕국을 물려받아서 프랑스의 앙리 4세로 즉위하게 되죠. 그리고 앙리 4세이후 앙리 4세가 물려받았던 나바라 지역은 프랑스 왕국에 완전히 합쳐지게 됩니다.
나바라의 엔리케 3세
후에 프랑스의 앙리 4세
그는 어머니에게서 나바라의 왕위계승권리를 이어받았으며 프랑스 왕가의 방계 가문인 부르봉 가문 출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결국 프랑스 왕위도 얻었습니다.
나바라 왕국은 에스파냐 왕국과 프랑스 왕국에 나뉘어서 합쳐졌기에 두 왕국의 국왕들은 오래도록 "나바라의 국왕"지위를 주장하면서 썼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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