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20)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 니콜라이 1세의 손녀(세번째)

엘아라 2019. 7. 3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20)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 니콜라이 1세의 손녀(세번째)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비

Grand Duchess Anastasia Mikhailovna of Russia 

Анастасия Михайловна

(28 July 1860 – 11 March 1922) 



아나스타샤는 결혼한 다음달인 1879년 2월 시집이자 이제 새 조국이 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수도인 슈베린으로 남편과 함께 가게 됩니다. 아나스타샤의 시아버지는 세번의 결혼으로 열한명의 자녀가 있었고 아나스타샤가 결혼했을때 열한명의 자녀들중 그녀의 남편과 시누이였던 미헨 대공비 둘만이 결혼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나스타샤와 프리드리히 프란츠는 신혼집을 받긴했지만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집을 마음대로 꾸밀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아나스타샤의 시아버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아나스타샤는 슈베린으로 와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녀는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한 슈베린의 궁정에 적응하는 것을 힘들어했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향수병을 앓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슈베린에서의 삶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인 프리드리히 프란츠의 건강 역시 그녀가 슈베린에 적응하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매우 허약했으며 자주 요양을 가야했습니다. 아나스타샤는 남편이 요양을 하는데 따라다녀야 했으며 이것은 그녀가 슈베린에 적응하는데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었습니다. 아나스타샤는 결혼한 그해 12월 첫아이인 알렉산드린을 낳았습니다만 남편의 건강은 악화되었기에 이곳저곳 요양을 다녀야했었고 둘째인 아들 프리드리히 프란츠 역시 남편이 요양하던 곳에서 낳았었죠. 부부는 주로 이탈리아 남부 도시였던 팔레르모에서 살았으며 아나스타샤는 가끔 친정식구들을 만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하기도 했었습니다.



아나스타샤


아나스타샤와 프리드리히 프란츠는 1883년 시아버지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이 사망할때 팔레르모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프란츠의 건강이 너무나도 나빴기에 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조차 참석할수 없었습니다. 건강을 간신히 회복한뒤 프리드리히 프란츠와 아나스타샤는 아이들을 데리고 슈베린으로 돌아갔으며, 프리드리히 프란츠는 이제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가 되었으며 아나스타샤도 이제 통치 군주의 아내가 되죠.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아나스타샤는 통치군주의 아내로써 지위를 누립니다만 그녀는 슈베린에 적응할 시간이 없었기에 곧 슈베린애서의 삶에 대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인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역시 건강이 문제가 되었기에 아나스타샤는 다시 슈베린을 떠나서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살기를 바라게 되죠. 하지만 이것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사람들이 용납할수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통치 군주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당대에서는 용납할수 없는 일이었고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아나스타샤를 비난했었다고 합니다.

결국 대공과 대공비 그리고 정부는 일년중 오개월은 슈베린에서 살고 나머지 시간은 대공부부가 원하는 곳에서 지내기로 합의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반드시 슈베린에서 태어나야한다는 조건도 있었죠. 그래서 막내인 체칠리는 슈베린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에서도 대공부부 특히 아나스타샤는 슈베린 성에서 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대신 발트해 연안에 있는 자신의 개인 집에서 지내는 것을 더 좋아했었습니다. 이곳에서 부부는 좀더 편안한 삶을 즐겼는데 대공은 주로 사냥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으며 아나스타샤는 아이들과 함께 지역 사람들을 방문하거나 인근의 숲이나 해변등으로 가면서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그리고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을 떠나서는 프랑스의 칸이나 파리 이탈리아 등지에서 지냈었죠.


아나스타샤 대공비는 이런 사적이고 느슨한 개인 생활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어린시절 강압적인 어머니의 교육을 좋아하지 않았었기 때문일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자신의 경험한 강압적 교육과는 달리 느슨하고 부모와 유대감을 갖는 교육을 시킵니다. 이때문에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자녀들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죠.


세 아이들과 함께 있는 아나스타샤




어려서부터 언어에 대해서 교육을 많이 받았던 아나스타샤 대공비는 아이들과 대화를 할때는 영어로 대화했으며 남편과는 프랑스어로 대화했다고 합니다.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독일어로 이야기했겠죠. 그녀는 테니스를 매우 좋아해서 자신의 집에 테니스코트를 마련할 정도였으며 이탈리아 음악을 좋아했는데 특히 푸치니의 오페라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나스타샤는 늘 긍정적인 삶의 마인드를 유지했었습니다. 그리고 늘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죠. 오빠와 남동생들과도 잘 지냈으며 아버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죠.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고 이때문에 종종 비난을 당했습니다. 물론 그녀는 혼수로 가지고온 자신의 개인 재산을 사용한 것이긴했습니다. 그러나 몬테카를로에 자주 드나들면서 엄청난 돈을 도박으로 잃었을때는 그녀를 늘 사랑했던 가족들조차도 그녀에게 비난할 정도였었습니다. 물론 이 문제로 사이가 나빠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어짜피 자기돈으로 도박하다 잃은것이니 그만하라고 하는 선에서 끝냈을듯합니다.)



아나스타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