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21)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 니콜라이 1세의 손녀(네번째)

엘아라 2019. 8. 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나스타샤는 의외로 많이 안봤던것이 제가 좋아하는 나라들에서 애매하게 비켜가서 그런듯합니다. 아하하 -0-;;;;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21)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 니콜라이 1세의 손녀(네번째)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비

Grand Duchess Anastasia Mikhailovna of Russia 

Анастасия Михайловна

(28 July 1860 – 11 March 1922) 



아나스타샤의 남편인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의 병세는 점차 악화되고 있었는데 특히나 1896년에서 1897년을 넘어가던 겨울 사이에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게 됩니다. 아나스타샤는 남편의 건강이 회복되길 바라면서 남부 프랑스의 그라스로 갔습니다. 이때쯤 둘의 첫째아이인 알렉산드린이 덴마크의 왕태자였던 크리스티안과 약혼하게 됩니다. 아나스타샤는 그라스에서 남편과 함께 몇주간 머문뒤 4월초 칸에 있는 집으로 돌갔으며 아들은 학업을 위해 드레스덴으로 보냈습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린



하지만 이 상황에서 비극이 일어납니다. 4월 10일 집안 사람들이 저녁식사를 할 무렵 마부가 정원의 7.6m높이의 벽아래서 대공이 쓰러져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도 그는 병마와 싸우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뛰어내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대공이 발견되었을때는 죽지는 않았었지만 곧 사망하죠. 공식적인 발표에서는 아픈 대공이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발코니에서 헛디뎌서 사고사했다고 발표되었다고 합니다. 아나스타샤는 위의 두 아이들인 알렉산드린과 프리드리히 프란츠와 함께 남편의 시신을 슈베린으로 운구했고 장례를 치루게 됩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슈베린에서 시집식구들과 슈베린 사람들에게 남편을 죽였다는 의심이 눈초리를 받게 됩니다. 대공의 석연치않은 죽음에 대해서 슈베린 사람들은 인기없었던 대공비인 아나스타샤에게 그 책임을 돌린것이었죠.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비록 원치 않는 결혼이었으며 늘 아팠던 남편이었지만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남편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합니다. 대공이 죽은뒤 대공의 지위는 아나스타샤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프란츠가 뒤를 이어서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가 되었으며 15살로 미성년자였기에 그의 숙부였던 요한 알브레히트가 섭정이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장녀인 알렉산드린은 덴마크 왕태자인 크리스티안과 약혼중이었으며 대공의 죽음으로 결혼은 잠시 연기 됩니다. 상이 끝난뒤 결혼식을 치루기로 했는데 아나스타샤는 딸의 결혼식을 덴마크나 슈베린이 아닌 칸에서 결혼식을 치뤄야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알렉산드린과 크리스티안(후에 크리스티안 10세)는 1897년 칸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때 알렉산드린



36살의 과부가 된 아나스타샤는 이제 더욱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녀는 발트해 인근의 자신의 집에서 더 많이 머물렀으며 슈베린에는 거의 가지 않았죠. 또 그녀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에서 머물기 보다는 친정식구들이 있는 러시아를 가거나 자주 머물렀던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지에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파리에는 작은 아파트를 하나 마련했고 거기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파티를 했으며 또 늘 몬테 카를로를 드나들면서 도박을 했고 거액의 돈을 쓰기도 했었습니다. 


과부로 자유로운 삶을 살게된 아나스타샤는 곧 자신의 비서였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팔토프와 연애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1902년 임신을 하게 되죠. 처음에 아나스타샤는 종양이 생겼다고 불러대면서 배가 불러오는 것을 감췄으며 후에 아이를 낳을때쯤에는 수두에 걸렸다면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야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결국 1902년 12월 아나스타샤는 니스에서 아들인 알렉시스 루이스 드 벤덴을 낳게 됩니다. 아이의 성인 벤덴은 그녀가 살던 집의 이름으로 사위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가 부여해준 성이라고 합니다. 아나스타샤는 사생아 아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고 자신이 키웠으며, 후에 아들을 노르망디에 있는 기숙학교로 보냈을때는 매일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등 다정한 어머니의 역할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녀주변 사람들, 특히 독일쪽 왕족들이 그녀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여기지 않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나스타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