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15) 바덴의 체칠리 : 니콜라이 1세의 며느리(첫번째)

엘아라 2019. 6. 2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제가 글쓰는 것을 늘였거든요.

녹비홍수 하는 바람에 흥분해서 버려뒀던 네이버 블로그에 미친듯이 녹비홍수 글을 쓰고, 어떨결에 네이버 밴드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거기도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또 그러고 나니 브런치에도 왠지 글을 써야할것 같아서 또 열심히 글을 쓰고 이러니까...뭐랄까 매일매일 글을 쓰는데도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죠.


예전에는 못쓰면 "아 못쓰는 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할수없지..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입니다.

음냐..-0-;;;; 하여튼 이런 불안 초조 상태를 벗어나야하는데 말입니다.

(어디 다른데 미쳐있으면 덜한데 요즘 미쳐있는 것이 없군요.ㅠ.ㅠ)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15) 바덴의 체칠리 : 니콜라이 1세의 며느리(첫번째)




바덴의 체칠리

러시아의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

Princess Cäcilie Auguste of Baden

Grand Duchess Olga Feodorovna of Russia 

Ольга Фёдоровна

(20 September 1839 – 12 April 1891),  



니콜라이 1세의 막내 며느리로 정교회로 개종한 뒤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로 불리게 되는 바덴의 체칠리 아우구스테는 1839년 바덴 대공령의 수도인 카를스루에에서 바덴 대공인 레오폴트와 그의 아내인 스웨덴의 소피아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계는 다른 많은 유럽 왕가들처럼 매우 흥미로운데 그녀의 부모는 친척관계였을뿐만 아니라 복잡한 정치적 연결고리로 맺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이 길어질것 같은 이유는 엄마가 스웨덴 공주라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하하..--;;;)


체칠리의 아버지인 바덴의 레오폴트는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바덴 대공 가문을 이을 신분이 아니었습니다.하지만 복잡한 정치적 문제는 그가 바덴 대공령을 상속받을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레오폴트는 바덴의 첫번째 대공이었던 카를 프리드리히와 그의 두번째 아내이자 귀천상혼한 아내인 호흐베르크 백작부인(여백작)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습니다. 



바덴의 대공 레오폴트

체칠리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는 첫번째 아내가 죽은 4년뒤 자신보다 40살이나 어린 루이제 게이어 폰 게이어스베르크라는 여성과 결혼합니다. 물론 루이제 게이어 폰 게이어스베르크는 통치군주 가문 출신이 아니었기에 둘의 결혼은 귀천상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결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이복 형제들과 거의 30살 가량 차이가 났습니다. 

레오폴트는 그의 이복형이자 바덴 대공가문의 후계자인 카를 루드비히와 35살 가량 차이가 났으며 그의 조카이자 후에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덴 대공이 되는 카를 1세 역시 그보다 4살이 더 많을 정도였습니다. 


호흐베르크 백작부인

체칠리의 할머니



아마도 이런 가족 관계 때문에 레오폴트와 그의 동생들은 바덴 대공가문에 기댈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레오폴트가 21살이 될때까지 살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인물은 그의 이복형도 아니고 조카였기에 아마 그에 대한 거리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귀천상혼한 가문 출신으로 상속권도 없었죠. 결국 레오폴트는 프랑스 군에 복무하면서 자신의 길을 모색했을 것입니다. (당대 바덴 대공가문은 다른 많은 독일 왕가들처럼 나폴레옹과의 동맹을 중요시했는데, 레오폴트의 조카이자 바덴 대공의 후계자였던 카를은 나폴레옹과 인척관계로 "프랑스의 공주"라는 칭호를 받았었던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와 결혼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그의 처지가 바뀌게 되는 것은 조카인 카를 1세에게 남성 후계자가 없게 되면서였습니다. 카를 1세와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어린시절을 넘기지 못했고 결국 후계자 문제가 발생합니다. 카를 1세의 숙부이자, 레오폴트의 이복형인 루드비히가 있었지만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기에 적자 후계자가 단절된 위기에 처하게 되죠. 결국 카를 1세는 자신은 물론 숙부가 남성후계자를 얻지 못해서 바덴 대공령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레오폴트와 그 동생들을 정식 바덴 대공가문의 일원으로 인정해서 이들에게 상속권리를 부여했으며 정식으로 제국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레오폴트의 조카이자 바덴의 대공이었던 카를



하지만 레오폴트의 상속에 대해서 당연히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반대 세력중 한명은 바로 카를 1세의 큰 누나인 바덴의 카롤리네와 결혼했던 바이에른의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였습니다. 보통 남성 직계가 단절되고 다른 분가가 없을 경우 여성 상속자의 아들에게 상속권리가 가는 경우가 많았었습니다. 그리고 제 1순위는 바로 카를 1세의 큰누나인 카롤리네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물론 결국 카롤리네는 성인으로 살아남는 아들은 없었습니다. 물론 그녀의 딸들은 프로이센왕비,작센의왕비, 오스트리아황제와 황후의 어머니들이 되긴합니다.) 결국 이 문제는 결국 바이에른 왕국에 편입되었던 바덴 대공가문의 영지 일부에 대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으로 바이에른 왕국 역시 양보하게 됩니다.



바덴의 카롤리네, 바이에른의 왕비, 대공 카를의 누나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두번째 부인, 그녀의 쌍둥이 딸들은 프로이센과 작센의 왕비들, 오스트리아 황제와 황후의 어머니들로 유명합니다.



아직 레오폴트와 그 동생들이 정식으로 바덴 대공가의 상속자로 인정받기 전, 카를 1세는 숙부의 계승 권리를 좀 더 강화하기 위해 유럽 왕가에서 혼처를 찾게 됩니다. 사실 바덴 대공가문의 상속자로 인정받기 전의 레오폴트는 겨우 귀천상혼한 가문의 상속권 없는 인물로 재산은 물론 영지조차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유럽의 통치가문이나 대가문들에서는 딸들을 레오폴트와 결혼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레오폴트가 통치 왕가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와 그의 후손들의 계승 권리를 강력히 주장할수 없었기에 통치 왕가 출신의 여성을 찾아야했습니다. 그리고 카를 1세는 자신의 조카이자 스웨덴의 공주였던 소피아를 숙부의 아내감으로 선택합니다. 사실 소피아가 레오폴트와 결혼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문제 때문이긴 했지만 그녀의 처지도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웨덴의 소피아 ,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딸

체칠리의 어머니



스웨덴의 소피아는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그의 아내인 바덴의 프레데리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프레데리케는 바덴의 대공인 카를 1세의 누나로 레오폴트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카를 1세의 누나들이자 소피아의 이모들은 바이에른의 왕비, 러시아의 황후 등이었기에 그녀는 나쁘지 않은 신붓감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당시 그녀는 이름뿐인 스웨덴의 공주였습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그의 아내인 바덴의 프레데리케

소피아의 어머니인 프레데리케는 바덴 대공 카를의 누나이자 레오폴트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



소피아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와 적대적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그의 이런 정책은 스웨덴에 큰 타격을 줬으며, 결국 스웨덴 내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서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그의 가족들은 스웨덴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후 스웨덴은 프랑스 장군으로 나폴레옹의 육군 원수들중 한명인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를 국왕으로 맞았으며,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의 이익을 위해서 프랑스가 아닌 반프랑스 동맹에 가입했고 결국 나폴레옹이 몰락한후 그의 지위를 굳히게 되죠. 이런 상황은 소피아의 아버지인 구스타프 4세 아돌프나 소피아의 오빠인 구스타프(구스타프손 구스타프)가 스웨덴 왕위를 되찾을수 없게 만듭니다. 결국 그녀는 화려한 가족관계가 있긴 했지만 이름뿐인 스웨덴의 공주였으며 심지어 그녀와의 혼담은 잘못하면 북유럽에서 강성해졌으며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동맹관계였던 스웨덴의 심지를 건들이는 일이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그녀가 외삼촌이었던 카를 1세의 뜻에 따라 레오폴트와 결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소피아는 14살이었던 1815년에 레오폴트와 약혼을 했는데 아마 너무 어렸기에 일단 약혼만을 했을 듯합니다. 그리고 1819년 레오폴트와 소피아는 정식으로 결혼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

유명한 빈터할터의 그림

빈터할터는 초기에 이렇게 바덴 대공가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왕가와 연결고리를 맺기 시작합니다.




레오폴트와 소피아는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나름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었다고 알려져있었습니다. 둘 사이에서는 여덟명의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중 막내가 바로 체칠리였습니다. 하지만 체칠리가 태어났을때 좀 말이 많았습니다. 레오폴트와 소피아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었지만 늘 부부가 좋을 수는 없었으며 한가지 문제 때문에 부부사이가 벌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바로 카스파 하우저의 죽음이었습니다. 레오폴트의 이복형인 루드비히가 죽기전 어느날, 한 소년이 발견됩니다. 바로 카스파 하우저였죠. 그리고 곧 그가 카를 1세와 스테파니 대공비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게 됩니다. 사실 둘의 아들이었지만 레오폴트의 어머니인 호흐베르크 백작부인이 아이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뒤 아이를 버렸다는 이야기였죠. 이 이야기는 심각하게 바덴에 퍼졌으며 심지어 스테파니 대공비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자기 아이일지도 모른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레오폴트의 계승권리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1830년 레오폴트는 바덴 대공 지위를 계승하게 됩니다만 카스파 하우저의 존재는 껄끄러운 것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1833년 카스파 하우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자, 다시 한번 카스파 하우저가 죽은 것이 바덴 대공가문에서 손을 쓴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게 되죠. 그리고 그 소문의 중심에 소피아가 있었습니다. 카스파 하우저의 암살을 사주한 것이 소피아라는 것이었죠. 소피아는 어머니인 프레데리카 처럼 정치적 문제에 관여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했던 여성이었기에 이런 소문은 아마 더 사실처럼 번져나갔을 것입니다. (물론 현재 학자들은 대부분 카스파 하우저가 바덴 대공가문과 혈연관계가 없다고 여기고 있으며 그의 죽음 역시도 대공가문과 직접적 관계가 없을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

바덴의 대공비

그녀는 남편인 카를 대공과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낳았지만 남성 후계자는 영유아기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이후 카스파 하우저가 나타났을때 시숙부인 레오폴트가 바덴 대공가문을 이을때쯤이었기에 아마도 그녀는 떠도는 소문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했을 듯합니다.




부부가 멀어진 사이 소피아는 남편외 다른 남자와 연애질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소피아의 위의 언니 오빠들은 대부분 나이차가 두세살 차이였지만 막내인 소피아는 바로 위의 언니인 마리와 다섯사이나 차이가 났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렇게 부부사이가 소원해진 상태에서 나이차가 나는 이이가 태어나면 유럽 궁정에서는 그 아이가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애인의 아이일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체칠리 역시 유럽의 궁정에서 그녀의 친아버지가 사실 대공이 아니라 대공비의 애인이었던 유대계 은행가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확인된바가 없지만 소문은 매우 오래가게 되는데 나중에 체칠리가 러시아로 시집간 뒤에도 그녀의 출생에 대해서 쑥덕대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덴의 체칠리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