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보면 미겔의 딸들은 은근히 대가문으로 시집가긴했는데 뭐랄까 통치 가문으로 시집간 이들은 대부분 두번째 아니면 세번째 부인이더라구요..ㅠ.ㅠ
포르투갈의 인판타들...(82) 포르투갈의 마리아 테레사 : 미겔의 딸 (첫번째)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
Infanta Maria Theresa of Portugal
Dona Maria Teresa da Imaculada Conceição Fernanda Eulália Leopoldina Adelaide Isabel Carolina Micaela Rafaela Gabriela Francisca de Assis e de Paula Gonzaga Inês Sofia Bartolomea dos Anjos de Bragança;
(24 August 1855 – 12 February 1944)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는 바이에른의 클라인오이바흐에서 포르투갈의 국왕이었지만 당시에는 망명중이었던 미겔과 그의 아내인 뢰벤슈타인-베르테임-로젠베르크의 아델하이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위로는 언니인 마리아 다스 네베스와 오빠인 미겔이 있었죠. 클라인오이바흐에는 뢰벤슈타인-베르테임-로젠베르크 공가의 성이 있었으며,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는 외가에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사의 부모
미겔과 아델하이트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가 11살때인 1866년 마리아 테레사의 아버지였던 미겔이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아델하이트는 미성년인 자녀들 일곱명을 데리고 살아야했습니다. 아델하이트는 이름뿐인 인판타라는 지위만 가지고 있는 딸들을 어떻게든 좋은 집안으로 시집보내려고 노력했었으며 그녀의 노력대로 그 딸들은 여러 통치가문으로 시집갔었습니다. 하지만 재산이 없고 이름뿐인 인판타인 미겔의 딸들은 대부분 두번째 부인이나 세번째 부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언니인 마리아 다스 네베스와 오빠인 미겔 그리고 여동생인 마리아 주제파와 함께 있는 마리아 테레사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는 당대 유럽의 미녀로 이름이 높았으며 이런 그녀는 17살때인 1873년 오스트리아 황족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와 결혼한 사람은 그녀보다 22살이나 많았으며 두명의 아내를 잃었던 오스트리아의 카를 루드비히 대공이었습니다. 그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네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의 장남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마리아 테레사보다 겨우 8살 어릴뿐이었습니다. 매우 나이차가 많은 홀아비와 결혼하게 됐지만 카를 루드비히의 신분은 마리아 테레사와의 결혼이 적당하다고 생각될 정도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동생이었죠. 특히 프란츠 요제프의 바로 밑의 동생인 막시밀리안이 죽고 난뒤 그는 황태자인 루돌프 다음으로 황위계승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었습니다. 게다가 카를 루드비히의 아내는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황후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여성이 되는것이는데 시씨황후는 자주 궁정을 비웠기에 궁정내에서 영향력을 가지는 지위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인 카를 루드비히 대공과 함께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
이렇게 결혼한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는 아마 많은 것을 참고 살아야했을 것입니다. 특히 남편인 카를 루드비히는 아내를 매우 괴롭히고 학대하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둘사이에서는 두 딸인 마리아 안눈치아타와 엘리자베트 아멜리가 태어나는데 사실 첫째 딸의 이름은 카를 루드비히의 두번째 아내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카를 루드비히는 사실 두번째 결혼으로 태어난 딸에게도 전처의 이름을 붙여주었었습니다. --;;;
천사로 분장한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의 두딸인 마리아 안눈치아타와 엘리자베트 아말리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는 비록 매우 불행한 결혼이었으며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참고 살아야했었지만 매우 다정한 성품으로 전처의 자녀들을 매우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아이들 모두 계모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인 카를 대공과 네명의 전처 자식들과 함께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
오스트리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로 불린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는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여성이 됩니다. 시씨황후는 자주 궁정을 비웠으며 아마 황태자가 결혼하기 전까지 황후가 궁정을 비울때마다 그녀가 황후가 해야하는 일들을 처리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황태자 루돌프가 1889년 자살한뒤 시씨황후는 궁정에서 은퇴한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고, 이렇게 되자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가 궁정 최고의 여성으로 궁정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공식행사등에 황제의 곁을 지키며 서있었고 늘 궁정에서 평판이 좋았던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에 대한 평판 역시 더욱더 올라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궁정 의무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남편인 카를 루드비히 대공이 1896년 사망하자 궁정에서 은퇴해서 평온한 삶을 즐기기로 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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