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03)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일곱번째)

엘아라 2019. 4. 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솔직히 늘 마리야의 이야기에서 가장  가슴아픈부분이 장남의 죽음과 남편의 배신이라죠.

비록 그녀가 자비롭고 심지어 남편의 정부마저도 인정해줬다고 하지만 여자로써 그렇게나 사랑했던 남편이 자신을 배신하고 남들이 다 알도록 그렇게 정부와 깨가 쏟아지도록 지냈다는 것이 가슴아프다죠. 게다가 알렉산드르 2세 같은 경우 진짜 아무래 사랑이 식었다고 해도 마지막에 아내에게 그럼 안되는 것이죠.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03)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일곱번째)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Maria Alexandrovna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Princess Maximiliane Wilhelmine Auguste Sophie Marie of Hesse and by Rhine

(8 August 1824 – 3 June 1880)

1860년대



알렉산드르 2세가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관계를 맺으면서 사실상 부부로써 알렉산드르와 마리야의 부부 관계는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둘은 황제와 황후였으며 자녀들도 있었기에 그냥 서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예카테리나와 그녀가 낳은 아이들에게 집중했으며 마리야는 자주 러시아를 떠나 여행을 하게 됩니다. 특히 친정인 다름슈타트를 자주 방문하게 되죠. 


마리야의 자녀들은 이제 성인으로 성장했고 하나둘씩 결혼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황위계승자가 된 차남인 알렉산드르는 형의 약혼녀였던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와 결혼했고 손자도 태어나게 되죠. 마리야는 늘 자애로웠던 사람이었기에 며느리에게도 매우 잘 대해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훗날 딸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영국으로 시집가는 원인중 하나가 됩니다. 마리야는 친정을 자주 방문했으며 여기서 빅토리아 여왕의 딸이자 조카와 결혼했던 앨리스 공주도 만나게 되죠. 다우마의 언니인 알렉산드라는 앨리스 공주의 오빠인 웨일스공과 결혼했으며 앨리스는 웨일스 공과 매우 친한 사이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라-다우마(마리야 표도로브나)와 앨리스-버티(에드워드 7세)의 연결고리는 황제와 황후의 고명딸을 앨리스의 남동생인 앨프러드를 연결해주는 결과를 낳게 되죠.



헤센 대공가 사람들과 함께 있는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맨 가운데가 황후입니다. 맨 오른쪽 여성이 앨리스 공주이고 맨 왼쪽에 서있는 여성이 바텐베르크 공비입니다.



마리야는 딸인 에든버러 공작부인이 첫아이를 낳던때인 1875년 영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그녀를 만나고 나서 마리야가 매우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지만 너무나 우울해했기에 너무나도 가여웠다고 적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은 마리야의 후반생에서 여러가지 불행한 일을 겪으면서 황후는 삶에 대해서 매우 비관적으로 느꼈기 때문일듯합니다.




첫외손자인 앨프러드를 안고있는 마리야 황후



또 마리야는 앨리스 공주가 죽은뒤에 아들인 세르게이를 데리고 다름슈타트로 갔었고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을 만났었죠. 그리고 여기서 세르게이는 후에 자신의 아내가 되는 엘라(헤센의 엘리자베트)를 만나게 되죠. 이때 전해져오는 재미난 이야기중 하나는 바로 알릭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황후는 알릭스를 보고서 자신의 시녀에게 "저애 손에 키스해요. 당신의 황후가 될거예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은 후에 알릭스가 마리야의 손자인 니콜라이 2세와 결혼하고 나서 생긱 이야기가 아닐까합니다. 훗날 알릭스와 니콜라이 2세의 딸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은 어린시절 증조할머니의 유령을 봤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비록 남편과의 부부관계가 끝났다고 하더라도 마리야는 황후였으며 러시아에서 정통적으로 황후는 황제의 정치적 파트너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야 역시 이를 계속 지켜갑니다. 비록 그녀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에 알렉산드르 2세는 늘 귀를 기울였고 아마도 황후는 남편에게 정치적 조언등을 아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황제와 황후


1880년이 되면서 마리야의 우울한 삶을 서서히 끝나가게 됩니다. 그녀의 건강은 너무나 나빠졌고 이제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마리야는 러시아로 돌아갔으며 러시아에 있는 겨울 궁전의 방에서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죠. 이 상황에서 황제는 마리야에게 더욱더 상처입히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당시 황제와 황실 가족들에 대한 테러가 극심했었는데 황제는 자신의 또다른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죽어가고 있는 아내가 있던 겨울 궁전에 예카테리나와 그녀의 아이들을 데려다 놓습니다. 게다가 마리야의 방 바로 위에 돌고루코바의 아이들을 머물게 해서 죽어가는 황후가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를 그대로 듣게 했다고 합니다. 비록 죽어가던 황후는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그녀의 아이들을 축복해줬다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 황제가 황후에게 너무 잔인하게 행동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 1880년 1월 겨울궁전의 식당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납니다.황실 가족들이 점심식사를 하는 시간에 맞춰서 시한폭탄이 터졌는데, 황실 가족들은 그때 식당에 있지않고 모두들 막 겨울 궁전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죽어가는 황후를 보기 위해서 오빠인 헤센의 알렉산더와 그의 아들인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가 왔는데 눈때문에 기차가 30분 연착했던것이죠. 황실가족들이 막 궁전의 정문에 들어섰을때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봤다고 합니다. 그때 황제는 미친듯이 뛰어가서 황후가 아닌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그녀의 아이들의 안위만 챙겼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헤센의 알렉산더는 무척이나 서운한 감정을 가지게 되죠.)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두 아이들과 함께 있는 알렉산드르 2세


이런 상황은 딸인 에든버러 공작부인이 죽어가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오면서 해결됩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행동에 경악했으며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였고 결국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죠.


에카테리나와 그녀의 아이들이 옮겨간뒤 황제 역시 예카테리나와 함께 지냈고 황후를 만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죠. 물론 황후의 자녀들은 어머니를 만나러 갔지만 말입니다.


결국 1880년 6월 황후는 사망합니다. 죽기전 황후는 남편에게 애정어린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1870년대 후반


마리야의 남편인 알렉산드르 2세는 아내가 죽은뒤 아내의 보석을 몇개 간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죽은지 한달도 안되서 "자유의 몸이 되면 아내로 맞겠다"라고 했던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결혼해버립니다. 이것은 황제에 대한 많은 이들의 실망감으로 이어졌는데 많은 이들이 적어도 아내의 상기간은 지켰어야한다고 생각했었죠. 그리고 이런 황제의 행동은 어머니를 너무 사랑했었던 아들들에게 아버지로써 황제로써 너무나 실망스러운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게다가 예카테리나와 결혼하므로써 그녀와 그녀 측근들이 정치적 권력을 얻을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 정치 권력 투쟁양상까지 벌어지게 되면서 더욱더 복잡한 상황이 되었죠.



알렉산드르 2세 

1881년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와 알렉산드르 2세 사이에서는 모두 여덟명의 자녀들이 태어납니다. 그중 장남인 니콜라이는 제일 기대 받던 인물이었지만 일찍 사망하죠. 차남인 알렉산드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황제가 되는 알렉산드르 3세이고 셋째아들인 블라디미르는 해군으로 남았으며 평생 "야심만만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인물이었습니다. 넷째아들인 알렉세이는 결혼문제때문에 복잡한 상황이었으며 평생 공식적으로 결혼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섯째 아들인 세르게이는 엘라대공비와의 결혼으로 유명했으며 또 매우 보수적 인물로 인기가 없었으며 인기없는 모스크바의 총독이었는데 아버지처럼 폭탄테러로 사망했습니다. 막내아들인 파벨은 첫아내가 죽은뒤 귀천상혼했었는데 후에 혁명때 살해당했습니다. 딸인 마리야는 영국의 에든버러 공작과 결혼했었죠.(...작년 새해특집에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알렉산드르 2세와 자녀들과 며느리인 마리야 표도로브나와 장손인 니콜라이 2세



그리고 이렇게 황후 사진을 합성한 사진이 있습니다.

아마 저기 빈 의자는 장남의 자리를 의미하는듯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