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02)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여섯번째)

엘아라 2019. 3. 2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이번편에는 틀림없이 못끝낼테니 다음편에는 끝낼수 있을까요 ㅠ.ㅠ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02)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여섯번째)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Maria Alexandrovna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Princess Maximiliane Wilhelmine Auguste Sophie Marie of Hesse and by Rhine

(8 August 1824 – 3 June 1880)



파벨을 낳고 난뒤 마리야의 건강은 악화 되었으며 의사는 그녀의 건강을 위해서 추운 겨울에 러시아가 아니라 따뜻한 지방으로 가라고 충고하죠. 마리야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서 크림지방으로 가게 됩니다. 남편인 알렉산드르는 아내를 위해서 폴란드 귀족의 집을 사서 아내에게 선물하죠. 마리야는 남편과 아들들인 알렉세이 세르게이 파벨과 함게 크림 지방으로 가죠. 1861년 처음으로 크림지방을 방문한 마리야는 온화한 날씨와 따뜻한 기후 그리고 아름다운 집에 반해버리게 됩니다. 마리야는 자주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남편이 선물한 집은 그녀의 취향대로 꾸미게 됩니다.



황제와 황후


게다가 습기가 많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후 역시 마리야에게 좋지 않다고 여겨졌으며 마리야는 여름에도 러시아를 떠나게 됩니다. 1864년 그녀는 역시 남편과 마리야,세르게이,파벨을 데리고 바이에른 지방의 온천으로 갑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바이에른의 국왕 루드비히 2세를 만났는데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2세는 매우 자애로웠던 황후에게 엄격한 어머니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모정을 느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마리야 역시 루드비히 2세에게 다정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에 국왕의 생일날 특별히 그를 방문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많은 왕가에서처럼 루드비히 2세는 마리야를 "aunt"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후에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다름슈타트로 가서 친정식구들을 만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야 황후 그리고 둘의 세 아이들인 마리야, 세르게이, 파벨



1864년말 마리야는 겨울철에 니스에서 머물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곧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자 장남이었던 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도 니스로 오게 됩니다. 니콜라이 대공은 막 약혼했었지만 그는 병약했었는데 특히 결핵균이 척수에 침범한 상태였기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니콜라이는 회복되지 못하고 1865년 니스에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게 됩니다. 



동생인 알렉산드르 대공과 함께 있는 나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64년


가장 사랑했던 장남의 죽음은 마리야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녀는 원래 연약했었으며 건강이 매우 나빴기에 자주 러시아를 떠나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남편과 가족들과 함께 하는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남의 죽음으로 그녀는 더욱더 종교에 몰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마리야와 남편인 알렉산드르 2세와의 사이도 멀어지게 하죠.


알렉산드르 2세는 아내가 러시아를 떠나있는 동안 가볍게 연애질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연약한 아내를 두고 정부를 뒀던것처럼 그리 심각한 연애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며 정부가 아내의 지위를 넘볼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오게 된 한 여성은 좀 달랐죠. 친구의 딸이었던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는 알렉산드르 2세의 정부가 되길 거부했었습니다. 심지어 그녀 가족 전체가 그녀에게 정부가 되라고 강요해어도 말입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장남을 잃은 알렉산드르는 실의에 빠졌었고 위로가 필요했었죠. 하지만 그와 함께 아픔을 나눠야할 아내는 종교에 몰입했죠. 이런 상황에서 그를 위로해준것은 예카테리나였습니다. 그 결과 황제는 자신의 딸같은 에카테리나와 불같은 사랑에 빠져버립니다. 예카테리나 역시 좌절에 빠진 황제를 위로하면서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결국 둘은 함께 지내기로 결정했으며 심지어 알렉산드르 2세는 예카테리나에게 "언제가 자유의 몸이 된다면 너와 결혼할것이다."라고 이야기할정도였습니다.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

후에 유리예프스카야 공비


사실 이 상황은 아무래도 마리야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그녀 역시 아들을 잃은 상황에서 충격을 받았고 이를 어렵게 극복하고 있었는데 평생 신뢰했고 행복했었던 그녀의 남편은 이제 더이상 그녀를 자신의 사랑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마리야에게 매우 힘들게 했을 것이며 그녀가 더욱더 종교에 심취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또 이런 가정 관계는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사실 아들들은 아버지가 정부를 두는 것에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수도 있었습니다. 어짜피 어머니인 황후의 지위는 확고했었으며 딸보다 어머니의 심정을 덜 이해했을테니까요. 하지만 마리야와 알렉산드르의 고명딸이었던 마리야에게 이런 가족 상황은 매우 큰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행복한 가족이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버지가 자기 또래의 여자에게 빠져서 어머니를 등한시 하는 모습은 너무나 힘든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배경으로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러시아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영국으로 시집가버렸을 것입니다.(그리고 ㅠ.ㅠ 마리야는 그냥 독일쪽의 적당한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았을텐데 말입니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마리야 황후의 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