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99)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세번째)

엘아라 2019. 3. 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99)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세번째)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Maria Alexandrovna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Princess Maximiliane Wilhelmine Auguste Sophie Marie of Hesse and by Rhine

(8 August 1824 – 3 June 1880)

1850년



러시아의 황태자비로써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삶은 화려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힘든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녀의 고향이었던 헤센 대공령은 그다지 큰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인근의 프랑크푸르트와 비교했을때 다름슈타트는 한적한 시골처럼 여겨질 정도였었죠. 이런 다름슈타트에서도 더 한적한 지방에서 자라났던 마리야는 유럽에서도 가장 호화롭고 화려하다는 러시아 궁정의 중심에서 살아가야했었고 이런 것은 그녀가 평생 한적한 삶을 그리워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녀는 파티와 화려하지만 복잡한 도시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야는 러시아 황위계승자의 아내였으며 후에 황후가 될 인물이었기에 자신의 역할도 잘 이해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스스로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궁정에서 화려한 파티에 참석하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황위계승자의 아내로써 해야하는 일들을 했었고 이런 그녀에 대해 궁정 내에서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대하게 되었을듯합니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1849년



마리야와 남편인 황태자 알렉산드르는 매우 행복한 부부였습니다. 서로에 대해서 사랑했으며 서로를 잘 돌봤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아내와 함께 하면서 아내를 자상히 챙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르는 아내가 궁정에서 어떻게 처신해야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잘 알려주었으며 이것은 마리야가 러시아 궁정에서 더 잘 지낼수 있게 행동할수있는 원인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는 아내에 대해서 평가도 후했는데 그는 아내가 교육을 잘 받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의 판단력을 존중해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자주 여러가지 정치적 문제까지도 이야기했으며 아내의 조언이나 충고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마리야는 순종적인 성격에 언제나 남편에게 다정한 사람이었기에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것 역시 그가 받아들일수 있도록 설득력있게 이야기했을듯합니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와 알렉산드르 2세



결혼 16달후인 1842년 8월 마리야는 첫아이인 알렉산드라를 낳습니다. 아마 첫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서 황태자는 물론 황실 가족들은 살짝 실망했을수도 있지만 알렉산드르는 아버지 니콜라이 1세처럼 첫아이자 딸인 알렉산드라를 끔찍이도 아끼게 됩니다. 그리고 첫아이가 태어난 다음해인 1843년 둘째아이이자 아들인 니콜라이가 태어나죠. 이후 마리야는 1845년에 알렉산드르와 1847년에는 블라디미르를 낳습니다. 이렇게 연달아 계속해서 아이를 낳은 마리야는 셋째아들인 블라디미르를 낳은 후 건강이 안 좋았고 잠시 온천으로 휴양을 가기도 했었습니다. 


마리야와 알렉산드르의 삶은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849년 둘의 첫아이이자 첫딸이었던 알렉산드라가 사망하게 되죠. 알렉산드라는 황실에서 매우 사랑받던 아이였습니다. 부모 모두가 사랑한것을 물론 아닌척했지만 "딸바보"로 유명했던 니콜라이 1세에게도 사랑받던 손녀였죠. 하지만 이런 사랑스러웠던 아이가 어린 나이에 죽자 모두들 큰 충격에 빠졌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평생 첫딸의 기일을 잊지 않았으며 마리야는 오랜 세월이 흐른뒤에도 첫딸에 대해서 언급할때면 늘 눈물 짓고는 했다고 합니다. 첫딸이 죽은 다음해에 마리야는 다시 아들인 알렉세이를 낳았습니다.



마리야의 첫아이인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러시아 궁정에서 10년의 세월을 사는 동안 마리야는 아마도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러시아 궁정에서 안정된 지위를 얻게 되었을 것이며 황실 가족들과 궁정 조신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녀의 시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는 똑똑하고 순종적이며 황실에 후계자 걱정없이 아들들을 한가득 낳아줬을뿐만 아니라 아이들 교육에도 매우 헌신적이었던 며느리를 흡족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지위는 그녀의 오빠가 스캔들을 일으켰어도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갈수 있게 했을 듯합니다.


마리야의 오빠인 헤센의 알렉산더는 동생과 함께 러시아로 왔으며 이후 러시아에서 군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독일에서는 동생과 마찬가지로 출생에 대한 뒷말때문에 문제가 있었지만 러시아에서는 황태자비의 오빠였기에 적어도 그에게 대놓고 함부로 못할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며느리에게 호의적이었던 니콜라이 1세가 마리야의 오빠인 알렉산더마저도 좋게 봤고 심지어 조카와 결혼시키려는 생각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헤센의 알렉산더는 동생의 시녀였던 율리아 하우케와 눈이 맞게 됩니다. 율리아 하우케는 아버지가 독일 출신이었지만 러시아 장군이었고 폴란드에서 니콜라이 1세의 형인 콘스탄틴 대공을 보호하려다가 사망했었습니다. 이때문에 니콜라이 1세는 율리아의 아버지의 행동을 표창하기 위해서 딸들을 황후와 황태자비의 시녀로 임명했었습니다. (황후와 황태자비의 시녀가 되는 것은 매우 명예로운 일로  황실 가족과 친분이 없다면 고위 귀족이 아니면 할수 없는 지위였습니다.) 그리고 율리아는 황태자비의 시녀로 일하다가 황태자비의 오빠와 눈이 맞은 것이었죠. 결국 헤센의 알렉산더와 율리아 하우케는 야반도주했고 이것은 궁정내에 스캔들로 헤센의 알렉산더는 러시아 궁정에서 추방당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스캔들에도 마리야의 지위는 굳건했죠.



마리야의 오빠 부부

헤센의 알렉산더와 바텐베르크 공비


마리야는 여전히 황태자비로 할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853년 그녀는 딸인 마리야를 낳습니다. 이미 첫딸인 알렉산드라를 잃었기에 둘째딸은 마리야와 알렉산드르의 고명딸과 마찬가지였으며 마리야는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는 아이로 성장하게 되죠.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