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98)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두번째)

엘아라 2019. 2. 2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98)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두번째)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Maria Alexandrovna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Princess Maximiliane Wilhelmine Auguste Sophie Marie of Hesse and by Rhine

(8 August 1824 – 3 June 1880)

1841년


마리는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다름슈타트의 궁정에서 떨어진 하일리겐베르크에서 어머니와 오빠인 알렉산더와 함께 보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 마리가 오빠인 알렉산더와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마리는 자라면서 어머니인 빌헬미네가 교육을 담당했는데 빌헬미네는 스스로 딸에게 프랑스 문학과 역사등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마리가 12살이 되던해 끝나게 되죠. 빌헬미네 대공비는 마리가 12살이 되기전인 1836년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어머니가 죽기전에 마리의 교육은 대공비의 시녀였던 마리안느 드 그란시가 맡았는데 그녀는 그란시 남작의 누이이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죽은뒤 마리와 그녀의 오빠인 알렉산더는 하일리겐베르크를 떠나서 아버지인 대공이 있는 다름슈타트 궁정으로 가게 됩니다. 어떤 소문이 있던 간에 둘은 헤센 대공이 인정한 헤센 대공의 자녀였으며 이때문에 어머니가 사망한뒤 양육책임은 아버지인 헤센의 대공에게 있었고 이에 대공은 아이들을 다름슈타트로 데려오게 했었을 것입니다. 마리는 늘 가까웠던 오빠인 알렉산더와 더욱더 가까워졌을뿐만 아니라 나이차가 많이나는 오빠들인 루드비히와 카를과도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아마도 둘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어린 여동생에 대해서 호의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헤센의 대공은 두 아이들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헤센의 카를

마리의 둘째오빠

대공 루드비히 3세의 동생이자 대공 루드비히 4세의 아버지



아마 마리는 다름슈타트로 온뒤에 사람들의 쑥덕거림과 대공의 거리감을 느끼면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인 알렉산더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소녀였던 마리에게 이런 쑥덕거림은 단지 쑥덕거림일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문은 그녀가 자라서 결혼할 시기가 되면 매우 큰 약점으로 작용할것이었죠. 하지만 푸른눈에 금발머리에 매우 자비로운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는 마리는 뜻밖에도 이런 약점에 구애받지 않고 결혼하게 됩니다. 왜냐면 마리에게 빠져들어서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 매우 대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839년 봄 러시아의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전유럽을 돌면서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황태자의 견문을 넓히겠다는 의도였지만 사실상 신붓감을 찾고 있었죠. 그는 오스트리아부터 이탈리아 독일에 이르기까지 여러곳을 다녔었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 친척들, 오스트리아 여대공들 등등을 만났었습니다만 딱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실 황태자의 방문 예정지 중에는 헤센 대공가문은 없었습니다. 일단 마리는 이때 열다섯살이 되지 않았기에 혼기에 이르지도 않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그녀를 둘러싼 소문 역시 무시할수 없었구요. 하지만 일정상 황태자는 다름슈타트를 지나갈수 밖에 없었고, 러시아 황태자가 지나가는데 잠시 초대라도 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루드비히 2세는 황태자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황태자는 잠시 다름슈타트에 하루정도 머물기로 했었죠.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대공

1838년


저녁에 대공은 황태자를 다름슈타트의 극장으로 초대했고 함께 오페라를 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대공은 황태자에게 자신의 가족들을 소개했죠. 여기에는 물론 마리도 포함되어있었습니다. 마리는 열다섯살이 되지 않았지만 나이에 비해 키크고 성숙해보였으며 늘씬했었죠. 아마 마리 역시 황태자와의 만남을 단순한 만남으로 여겼기에 그리 엄격하게 예의를 차리지 않았고 소녀답게 약간은 느슨한 복장으로 만났으며 심지어 그녀는 체리를 먹다가 황태자를 소개 받아서 체리씨를 손에 들고 있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늘씬한 모습에 길게 늘어뜨린 금발머리에 푸른눈의 소녀가 격식없는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본 황태자는 첫눈에 반해버리게 됩니다. 황태자와 함께 여행에 동행했던 황태자의 가정교사는 마리에 대해서 "아름답고 온화하며 심지어 지적이기까지하다"라고 언급했었습니다. 알렉산드르는 마리를 더보기 위해서 대공의 저녁 식사 초대도 참석했죠.



바실리 주코프스키

알렉산드르 2세의 가정교사


황태자는 일정대로 떠나게 되었는데, 마리는 그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넣은 로케를 선물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황태자는 아버지인 황제에게 잉글랜드로 갔다가 다시 다름슈타트로 가도 되냐는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더 중요한것은 알렉산드르는 아버지에게서 허락을 얻기 위해서 사순절 끝에 이 편지가 도착하도록 안배를 합니다. 사순절 끝에는 늘 긍정적 일을 해야했기에 거절할수가 없게 만든것이죠. 물론 니콜라이 1세는 허락하지 않을수 없었지만 마리와 아들의 결혼을 또다른 문제였습니다. 그 역시 마리에 대한 소문을 잘 알고 있었고 이런 소문이 있는 여성을 며느리로 바로 맞을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아들 알렉산드르 2세와 함께 있는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르는 여전히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했는데 아직 미혼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서 그녀와 밤새도록 파티를 즐겨서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들기도 했었고 네덜란드로 가서 고모인 마리야 파블로브나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는 다름슈타트로 다시 돌아왔으며 마리와 결혼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게 되죠.


마리의 출생 문제외에도 당시 마리의 나이가 너무 어린것도 문제가 되었는데, 황태자는 약혼 기간이 길어짐에도 자신의 의지를 꺽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리는 1840년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황태자인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약혼을 발표합니다.


헤센의 마리가 사실 아무런 문제없이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된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그녀의 출생의 문제는 누구라도 테클걸만한 것이었으며 당연히 황태자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결혼을 축복해주기를 거부하면서 심하게 반대하죠. 그녀는 마리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반대했는데 그녀의 친아버지가 의심스러운 문제뿐만 아니라 마리가 어머니인 빌헬미네 대공비 의 행동(남편외에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은것)을 배우거나 따라할것을 걱정했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의 결정은 확고했었죠. 결국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황제인 니콜라이 1세가 중재에 나서게 됩니다. 이미 공식 약혼까지 발표한 상황에서 아내의 반대에 대해서 니콜라이 1세는 아내를 달래야하는 입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황제가 중재해서 황제 부부는 일단 마리를 만나보기로 결정합니다. 1840년 6월 황제 부부는 다름슈타트 인근에 있던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했으며 그곳에서 마리를 만나게 되죠.  아마도 평생 온화하고 다정하고 성실했다는 등등의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마리는 어린시절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며 결국 마리를 만나보고 황제 부부는 매우 흡족해했으며 황후는 이제 반대로 며느리감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혼이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니콜라이 1세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1840년 8월 갓 16살이 된 마리와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이제 그녀의 결혼을 위해서 러시아로 떠나게 됩니다. 특히 마리의 오빠인 헤센의 알렉산더가 여동생인 마리를 데리고 러시아로 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러시아에 남게 되는데 이 결정은 후에 새로운 이야기꺼리를 만들게 되죠.


러시아에 도착한 마리를 위해서 러시아에서는 화려한 축제가 벌어지게됩니다. 여러가지 연극이나 발레 공연등이 열렸으며 매주 일요일마다 황후는 이제 며느리가도리 마리를 위해서 파티를 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이전에 헤센같은 작은 나라에서 조용히 살았으며 겨우 16살밖에 되지 않았던 마리에게는 나름 힘든 일이기도 했었다고합니다. 마리는 훗날 자신의 시녀였던 안나 티튜체바에게 아버지에게 거의 소외받고 자랐던 작고 어린 공주가 유럽의 가장 화려한 곳에서 얼마나 힘들었지만 우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수 없어서 어두워져서 겨우 방으로 돌아와서 혼자가 되었을때야 겨우 자유롭게 울수있었다고 말했었다고 합니다.



안나 티튜체바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시녀

후에 그녀는 황후에 대한 회고록을 썼습니다.



1840년 12월 17일(구력으로는 12월 5일) 마리는 러시아 황실가족이 되기 위해 정교회로 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개종하면서 그녀는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라는 정교회식이름을 받게 되죠. 이후 그녀는 평생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죠. 이제 곧 새 황태자비가 될 마리는 곧 많은 외국 군주들과 왕족들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많은 러시아인들도 만나게 되죠. 하지만 그녀는 궁정에서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 빨리 터득했으며 이제 새로운 자신의 조국이 된 러시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알렉산드르의 여동생이었던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새 올케언니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는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죠. 이것은 마리가 시집 식구들 모두에게서 점차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이야기일듯합니다.


1841년 4월 28일(구력 4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에 있는 성당에서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날은 알렉산드르 대공의 23번째 생일 전날이었다고 합니다. 마리는 은과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신부의 흰 드레스를 입고 다이아몬드 티아라,목걸이,귀걸이를 했습니다. 황후는 이제 며느리가 될 마리야의 머리에 오렌지 꽃으로 장식해줬으며 브로치를 꽂아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난뒤 참석했던 모든 황실 가족들과 외국 왕족들과 러시아 조신들은 모두 저녁 식사와 파티에 참석했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결혼


이렇게 이제 마리는 러시아의 황태자비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로 본격적으로 러시아에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