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며느리들이 왔군요. 니콜라이 1세의 후손들은 좀 복잡한데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네요.
일단 며느리들은 다하고 나서 손자며느리들까지 하고 다시 알렉산드르 2세의 딸과 며느리들을 해야할지 아니면 일단 며느리들을 하고 알렉산드르 2세쪽-알렉산드르3세-니콜라이 2세까지하고 방계가문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할지 고민이네요 --;;;;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97)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첫번째)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Maria Alexandrovna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Princess Maximiliane Wilhelmine Auguste Sophie Marie of Hesse and by Rhine
(8 August 1824 – 3 June 1880)
1830년대
헤센-다름슈타트의 막시밀리아네 빌헬미네 아우구스테 조피 마리는 헤센의 대공인 루드비히 2세와 그의 사촌이자 부인이었던 바덴의 빌헬미네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서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어머니와 같이 빌헬미네라는 이름으로 불렸었지만 그녀는 일찍 러시아로 시집갔고 러시아식 이름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잇었기에 마리라는 이름으로도 더 잘알려지게 됩니다.
바덴의 빌헬미네
마리의 어머니
마리의 어머니인 바덴의 빌헬미네는 바덴 대공 가문의 후계자였던 카를 루드비히와 그의 아내인 헤센-다름슈타트의 루이제의 딸로 그녀의 언니들은 바이에른의 왕비가 되는 카롤리네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가 되는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그리고 스웨덴의 왕비가 되는 프레데리카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결혼 관계는 빌헬미네 역시 유럽의 중요한 결혼 상대로 만들었으며, 아마도 그녀의 외삼촌이자 시아버지가 되는 대공 루드비히 1세가 그녀를 며느리로 맞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빌헬미네의 큰언니
바덴의 카롤리네
바이에른의 왕비
그녀의 딸들은 프로이센,작센의 왕비들이었고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역시 그녀의 딸이었습니다.
헤센 대공가문의 후계자인 루드비히 (후에 루드비히 2세)와 빌헬미네는 무려 11살이나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또 성격도 루드비히는 조용하고 내성적 성격이었던 반면 빌헬미네는 아름답고 활기찬 성격이었죠. 1774년 결혼한 부부는 세아들을 얻었는데 그후에 곧 부부는 떨어져 지내게 됩니다. 왜냐면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고 루드비히는 군인으로 전장에 참전해야했기 때문입니다.(루드비히 1세는 나폴레옹 전쟁을 이용해서 헤센-다름슈타트를 헤센 운트 바이 라인 대공령으로 승격시킨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그가 나폴레옹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했다는 의미이고 그의 아들인 루드비히 역시 전장에 있어야했죠.)
아마 다른 성격과 오랜 별거생활은 부부를 더욱더 멀어지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비록 한명의 아들이 어린시절 사망했지만 두아들들이 있었기에 후계자 문제는 걱정이 없었고 이에 부부는 계속 떨어져 지내게 되죠.
헤센의 대공 루드비히 2세
그러나 셋째아들이 태어난 11년후부터 빌헬미네는 다시 아이들을 낳기 시작합니다. 연년생으로 네명의 아이를 낳게 되죠. 이렇게 되자 전 유럽 궁정에서는 쑥덕대는 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루드비히와 빌헬미네는 오래도록 별거했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태어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물론 가끔 부부가 서로 함께 하기로 하는 경우가 있어서 나이차가 많이 나는 아이가 태어나긴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만 이런 경우는 대부분 후계자 문제때문이었기에 이미 후계자가 있는 부부사이여서 더욱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게 되죠.
유럽 궁정에서는 이 뒤에 태어난 아이들은 빌헬미네의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그녀의 시종무관인 아우구스트 폰 센나르크린스 드 그란시 남작의 아이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아우구스트 드 그란시
대공비의 시종무관
아이들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
하지만 루드비히는 아내가 낳은 아이들 모두를 자신의 아이들로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상속권도 인정하는 의미였기에 매우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그는 평생 이 뒤에 태어난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지 않았으며 상속권 배제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뒤에 태어난 네명의 아이들중 아들인 알렉산더와 딸인 마리(빌헬미네)만이 성인으로 성장하게 되죠.
1827년 루드비히와 빌헬미네는 공식적으로 별거에 들어갔으며 1828년 빌헬미네는 다름슈타트 인근에 슐로스 하일리겐베르크 짓고 거기에서 어린 두 아이들인 알렉산더와 마리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829년 은혼식을 열면서 루드비히와 빌헬미네는 서로 평온한 사이로 보였으며, 1830년 루드비히가 헤센의 대공이 되고 되고 난뒤 대공부부는 도리어 더 원만한 사이가 되었고 대공은 아내의 거처인 하일리겐베르크에서 늘 여름을 보내고는 했다고 합니다.
빌헬미네 대공비
이런 상황은 모두가 마리가 과연 대공의 딸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상태가 되는 원인이 됩니다. 딸인 마리는 가문의 영지의 상속권이 없었지만 아들인 알렉산더는 가문의 상속권을 가지는데도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한 것은 애매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로 두 아들들이 있었고 부부가 공식적으로 별거를 하기까지 했던 상황을 봐서는 빌헬미네의 부정에 더 무게가 실리기도 합니다만 또 부부가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는것역시 사람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 문제는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흥미꺼리였는데 헤센 대공 루드비히 4세의 딸로 후에 헤센의 알렉산더의 며느리가 되는 헤센의 빅토리아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가터 훈장의 모토인 "Honi soit qui mal y pense"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재앙이 일으리"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빅토리아의 아들이었던 버마의 마운트백작인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의 경우 자신의 증조부가 헤센의 대공이 아닐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헤센의 빅토리아와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
둘은 오촌관계로 빌헬미네 대공비의 후손입니다.
빅토리아는 빌헬미네 대공비의 둘째아들의 손녀이고, 루드비히는 막내아들의 아들입니다.
어쨌든 이런 스캔들 속에 태어난 마리는 사실 높은 왕가로 시집갈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이긴 했을 것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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