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포르투갈

포르투갈의 인판타들...번외편 (6) 브라질의 이자벨 : 브라질의 페드루 2세의 딸 (첫번째)

엘아라 2019. 2. 2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페드루 1세의 딸들은 사실 포르투갈의 인판타들이라기 보다는 브라질의 공주들이었죠. 마리아 2세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특히 마리아 아멜리아의 경우는 완전히 브라질 황족이었는데 그러면 애매해지니까 그냥 포르투갈의 인판타들에 넣었습니다. 그러나 뭐 페드루 2세의 경우는 완전히 분가니까 따로 적어야해서 번외편으로 넣습니다. 딸이 둘밖에 없어서 둘만 적으면 되니까요 아하하 -0-;;;


포르투갈의 인판타들...번외편 (6) 브라질의 이자벨 : 브라질의 페드루 2세의 딸 (첫번째)




브라질의 이자벨

브라질의 황위계승자

Isabel, Princess Imperial of Brazil

(29 July 1846 – 14 November 1921), 

nicknamed "the Redemptress"

Isabel Cristina Leopoldina Augusta Micaela Gabriela Rafaela Gonzaga  de Bragança

5살때



브라질의 이자벨은 브라질의 황제 페드루 2세와 그의아내인 양시칠리의 테레사 크리스티나의 둘째 아이이자 첫째 딸로 리우데자네이로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자벨의 이름은 외할머니인 마리아 이사벨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자벨의 아버지인 페드루 2세는 포르투갈 왕가의 후손이긴 했지만 그의 아버지인 페드루 1세가 브라질 황제로 즉위하고 난뒤 복잡한 정치 관계때문에 포르투갈의 왕위계승권을 이어받지는 않았습니다. 페드루 2세는 1831년 아버지가 쫓겨난뒤 6살이 되지 않은 나이에 브라질의 황제가 되었으며 브라질은 그가 성년이 될때까지 섭정들이 운영했었습니다. 매우 온화하고 개혁적 인물이었던 페드루 2세는 스스로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서는 등의 일을 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페두르 2세

1840년대


이자벨의 어머니인 양시칠리의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양치실리의 국왕 프란체스코 1세와 그의 아내인 에스파냐의 마리아 이사벨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테레사 크리스티나의 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에스파냐의 왕비로 이사벨 2세의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또 그녀의 어머니는 페드루 2세의 할머니인 마리아 호아키나 왕비의 여동생이기도 햇었죠.(아 복잡한 족보관계)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매우 고립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매우 다정하고 자비로운 성격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양 시칠리의 테레사 크리스티나


1840년대 브라질의 황제인 페드루 2세가 신붓감을 찾고 있다는 소식에 양시칠리 정부는 적극적으로 공주를 시집보내려했었고 결국 일이 성사되어서 1843년 대리결혼을 치루고 나서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브라질로 갑니다. 브라질에 도착한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페드루 2세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지만 페드루 2세는 그녀의 외모등에 매우 실망스러워했으며 이 사실을 알게된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매우 충격받았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페드루 2세는 온화한 성격이었으며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좋은 아내로 늘 남편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여성이었기에 둘은 평온한 가정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둘 사이에서는 연년생으로 네명의 아이가 태어나게 되죠.



두딸과 함께 있는 페드루 2세 부부


이자벨이 태어났을때는 오빠인 아폰수가 살아있었으며 후에 남동생인 페드루도 태어납니다. 하지만 1850년 동생인 페드루가 사망하고 더이상 아들을 얻을수 없자 장녀인 이사벨이 브라질 제국의 계승 후보자가 됩니다. 하지만 페드루 2세는 아들들을 잃고 나서 아들들을 잃은 슬픔과 제국의 앞날에 대해서 매우 우울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의 관점에서 브라질은 여성 통치자를 받아들일만한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딸인 이자벨이 제위에 오른다고 해도 권력층을 억누를수 없을 것이라 여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페드루에게는 대안이 없었으며 결국 이자벨이 제국의 계승자가 되죠.



이자벨

1858년


이자벨은 1854년 교육을 시작합니다. 특히 페드루 2세는 딸들의 가정교사가 될 인물을 찾게 되는데 바랄 백작부인이었던 루이사 마르가리다 데 바로스 포르투갈이었습니다. 그녀는 원래 브라질 출신으로 프랑스 귀족과 결혼한 여성이었죠. 사실 페드루 2세는 새어머니였던 아멜리아 황후에게 딸들의 가정교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었지만 아멜리아 황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신 페드루의 누나인 주앵빌 공비였던 프란시스카가 자신의 친구였던 바랄 백작부인을 소개시켜준것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프랑스를 떠나 자녀와 함게 리우 데자네이로로 갔으며 아름답고 지적이었던 그녀는 곧 궁정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됩니다. 페드루 2세는 그녀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이었고 과도하게 호의적이었기에 황제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일정도였으며 황후인 테레사 크리스티나는 그녀에 대해서 질투했었다고 합니다. 


페드루의 두 딸들인 이자벨과 레오폴지나는 가정교사인 바랄 백작부인에 대해서 부모처럼 서로 상반된 입장이었는데 이자벨은 아버지인 페드루 2세처럼 바랄 백작부인을 좋아했던 반면, 레오폴지나는 어머니인 테레사 크리스티나 황후처럼 바랄 백작부인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이자벨은 바랄 백작부인을 롤모델로 삼았으며 평생 그녀와 호의적으로 지냈었다고 합니다.


바랄 백작부인과 세아이들과 함께 있는 이자벨

1880년대




이자벨은 동생인 레오폴지나와 함께 다양한 수업을 들었습니다. 프랑스와 포르투갈 문학,천문학,화학,유럽 여러나라의 역사와 정치경제,지리학과 지질학 등은 물론 그림그리기와 음악등도 배웠으며 언어도 배웠습니다. 이때문에 이자벨은 포르투갈어는 물론 프랑스어와 영어 독일어등을 매우 잘했다고 합니다. 



이자벨과 레오폴지나

1855년


이자벨은 아버지로부터 천문학등을 배우기도 했지만 정작 페드루는 계승자가 될 이자벨에게 정치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당대 여성들이 정치에 나서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던 많은 이들처럼 페드루 역시 딸이 계승자이지만 정치에 나서는 것을 원치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치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였던 황제 카를 6세가 딸의 계승자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었지만 정작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정치적인 문제를 가르치지 않아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통치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던것과 비슷한듯합니다. 하지만 이사벨은 불행히도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능력이 딸렸고 이런것은 결국 브라질의 복잡하고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더욱더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