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포르투갈의 인판타들...번외편 (8) 브라질의 이자벨 : 브라질의 페드루 2세의 딸 (세번째)
브라질의 이자벨
브라질의 황위계승자
Isabel, Princess Imperial of Brazil
(29 July 1846 – 14 November 1921),
nicknamed "the Redemptress"
Isabel Cristina Leopoldina Augusta Micaela Gabriela Rafaela Gonzaga de Bragança
1870년
페드루 2세는 딸들의 남편감을 유럽 왕가에서 찾게 됩니다. 그는 프랑스와 벨기에 왕가에서 후보자를 찾았습니다. 먼저 프랑스 왕가에서는 주앵빌 공의 아들인 팡티에브르 공작 피에르였습니다. 그는 페드루 2세의 누나인 프란시스카의 아들이었기에 역시 브라질 황가와 연관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괜찮은 상대였었죠.
또 다른 사람은 플랑드르 백작인 벨기에의 필리프였습니다. 그는 벨기에의 레오폴 1세와 그의 두번째 아내인 루이즈 도를레앙의 아들로 루이즈 도를레앙은 페드루 2세의 누나인 프란시스카의 시누이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쪽 연결고리로 그를 고려한것이었는데 플랑드르 백작이 빅토리아 여왕과 사촌인점도 어느정도 고려대상이었을 수 있습니다.
팡티에브르 공작 피에르
이자벨의 사촌
하지만 이 두 후보자는 브라질의 공주들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피에르는 해군으로 살고 싶어했는데 브라질의 황위계승자와 결혼한다면 브라질에 머물러야해서 해군으로 활동할수 없었던 것이었죠. 아마도 그는 황위같은 힘든 일을 원치 않았던듯합니다. 그리고 플랑드르 백작은 유럽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그는 후에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의 마리와 결혼하는데 마리의 언니인 스테파니는 포르투갈의 페드루 5세의 왕비이기도 했었습니다. 필리프의 아들인 알베르는 후에 백부의 뒤를 이어 벨기에의 국왕 알베르 1세가 됩니다.
팡티에브르 공작, 플랑드르 백작과의 혼담이 물건너가자 주앵빌 공은 가문의 다른 친척들을 신랑감으로 추천합니다. 조카였던 외백작 가스통과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루드비히 아우구스트였습니다. 외백작 가스통은 프랑스의 국왕 루이 필리프의 둘째아들이었던 느무르 공작 루이와 그의 아내인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빅토리아의 아들이었습니다. 느무르 공작부인 빅투아르라고 불렸던 빅토리아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사람으로 그녀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기도 했었습니다.
외 백작 가스통
1861년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루드비히 아우구스트는 느무르 공작부인의 조카로 그의 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이었으며 그의 어머니인 오를레앙의 클레망틴은 프랑스의 국왕 루이 필리프의 딸이었습니다. 루드비히 아우구스트의 큰형은 벨기에의 루이즈 공주와 결혼했었으며 루드비히의 막내동생은 후에 불가리아의 군주가 되죠. 또 그의 백부인 페르디난트는 페드루 2세의 누나인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와 결혼했고, 페드루 2세의 조카들이었던 포르투갈 국왕들은 루드비히 아우구스트와 사촌관계이기도 했었습니다.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루드비히 아우구스트
유럽 왕가의 결혼은 보통 신랑 후보가 신부감을 만나기 위해 가는 것이었는데 정략결혼이었기에 대부분 결혼이 대충 결정된 뒤에 가는 것이라 결혼을 깨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결혼을 깨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라던가 스웨덴의 칼 15세라던가...--;;그러고보니 전부 스웨덴만 예로 들고 있군요. 어쨌든 스웨덴의 경우 정부간의 협약까지 다 체결해놓은 상태에서 결혼을 깨서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
이때문에 처음에는 외 백작은 레오폴지나와 결혼하고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가 이자벨과 결혼하기로 합의가 되었지만 페드루 2세는 딸들의 감정을 지켜봐야한다고 주장했었다고 합니다.
외 백작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역시 1864년 신붓감들을 만나기 위해 브라질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1864년 9월 두 사람을 브라질에 도착하게 되죠. 외 백작은 브라질 공주들을 만나고 나서 두 공주다 모두 못생겼지만 그나마 이자벨이 좀더 낫다고 기록했었다고 합니다. 이자벨과 그녀의 동생인 레오폴지나 둘다 남편감을 만났는데 이자벨은 외 백작을 보고 반해버리게 되죠. 결국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9월 18일 외 백작과 이자벨,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과 레오폴지나의 약혼이 발표됩니다. 그리고 이자벨과 외 백작은 10월 15일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자벨과 가스통의 결혼식
결혼하면서 이자벨의 황위 계승자 지위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은 많은 생각을 합니다. 외 백작은 아내에게 정치에 관여하라고 격려했으며 황제 역시 딸을 내각에 소개시키는등의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자벨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당대 상류층 여성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상황은 훗날 그녀가 남편인 외 백작에게 의지하는 결과를 낳았고 브라질 내의 불만을 가중시키는 것이기도 했을 듯합니다.
이자벨은 1865년 남편과 함께 유럽으로 갑니다. 아마도 시댁식구들과 유럽의 친척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당시 브라질과 영국과의 외교적 마찰이 발생했을때 그녀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개인자격으로만 만날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자벨과 외 백작이 브라질로 돌아온 뒤, 페드루 2세는 사위에게 파라과이 전쟁의 전선으로 나갈것을 명했고 외 백작은 전선으로 갔고 이자벨은 홀로 지내야했다고 합니다.
외 백작 가스통
1870년
파라과이 전쟁이 끝난 뒤인 1870년 이자벨과 외 백작은 다시 유럽을 여행했는데, 1871년 동생인 레오폴지나가 죽었을때 부부는 빈에 머물고 있었고 이때문에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된 동생을 볼수 있었다고 합니다. 동생이 죽음으로써 이자벨은 페드루 2세 부부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가 되었으며 제국내의 그녀의 역할은 더욱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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