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포르투갈

포르투갈의 인판타들...번외편 (9) 브라질의 이자벨 : 브라질의 페드루 2세의 딸 (네번째)

엘아라 2019. 3. 1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흑..글이 점점 길어지고 있어요 -0-;;;



포르투갈의 인판타들...번외편 (9) 브라질의 이자벨 : 브라질의 페드루 2세의 딸 (네번째)





브라질의 이자벨

브라질의 황위계승자

Isabel, Princess Imperial of Brazil

(29 July 1846 – 14 November 1921), 

nicknamed "the Redemptress"

Isabel Cristina Leopoldina Augusta Micaela Gabriela Rafaela Gonzaga  de Bragança

1870년대



이자벨과 외 백작은 1871년 5월 브라질로 돌아옵니다만 한달후쯤에 황제와 황후가 유럽으로 떠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이자벨은 섭정으로 임명되었으며 황제가 없는 동안 브라질의 모든 사항을 결정할수 있는 최고 권력을 부여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자벨의 명목상 권리였으며 실제 권력은 수상이었던 리오 브란코 자작이었던 주제 파라노스와 이자벨의 남편이었던 외 백작 가스통이 가지고 있었죠.


이자벨이 섭정을 하고 있던 이 기간 이자벨은 중요한 역사적 결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페드루 2세는 브라질 내의 노예 해방 문제를 점진적으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페드루 2세가 새로 발표하려던 법령은 노예 신분의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더이상 노예 신분이 아니라 자유민 신분을 부여하려던 법안이었죠. 그리고 1871년 9월 28일 이자벨은 이 법안에 서명을 하면서 이 법안이 브라질에서 정식으로 효력을 발휘할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3월 이자벨의 아버지인 페드루 2세가 브라질로 돌아오면서 이자벨의 섭정 지위를 끝났고 그녀는 다시 자신의 평온한 개인적 삶으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페드루 2세와 함께 있는 이자벨

1870년


이자벨은 결혼초부터 아이를 몹시 바랬지만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872년이 되어서야 첫아이를 가지는데 아이를 유산하게 되죠. 이자벨은 이때문에 불임이 될것을 걱정했고 1873년 유럽으로 가서 전문의의 검진을 받았으며 또 성모 발현으로 유명했던 루르드 지방을 방문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는 샘물로 알려진 루르드의 샘물을 마셔서 아이를 갖기 위한 자신의 소망을 이루려했던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노력으로 1873년 12월 이자벨은 다시 임신했죠. 이자벨은 황위계승자였기에 그녀의 아이는 브라질의 황위계승자였으며 이때문에 황위 계승자를 외국에서 태어나게 할수는 없었으며 페드루 2세는 딸과 사위에게 서둘러 브라질로 돌아오라고 독촉했다고 합니다. 1874년 4월 이자벨은 브라질로 돌아왔으며, 7월에 아이를 낳게 되죠 하지만 50시간이 넘는 진통끝에 아이는 사산되어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자벨은 곧 다시 임신하지만 두번이나 아이를 잃었던 경험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녀를 위해서 프랑스에서 산파와 의사를 초빙했으며 1875년 외할아버지인 페드루 2세의 이름을 딴 페드루 데 알칸타라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첫아이인 페드루 데 알칸타라와 함께 있는 이자벨 부부



이자벨의 임신과 출산은 그녀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것이었지만 브라질의 황위계승자를 낳는 문제였기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자벨은 아이를 얻길 간절히 바랬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종교에 의지할수 있는 많은 것을 의지했었습니다. 그 결과 브라질내에서 교회의 발언권이 매우 세졌고 이것은 복잡한 브라질 정치 상황을 더욱더 악화시키는 요인중 하나로 작용됩니다. 또 그녀가 첫아들을 낳을때 외국인 의사와 산파를 데려왔기에 브라질 의사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이런 사소한 일도 불만이 쌓이고 있는 상황이었이게 후에 파장이 커지게 되었을 듯합니다.


1876년 황제가 미국과 유럽 순방을 떠나게 되면서 이자벨은 다시 섭정이 됩니다. 하지만 이전 섭정 상황과는 달리 브라질은 매우 혼란한 상황이 됩니다. 선거가 있었기에 섭정이 이자벨에 대한 비방이 나오게 되었으며 교회와 정부간의 갈등은 이자벨을 난처하게 만들었죠. 이런 스트레스 상황에서 이자벨은 또 유산했으며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습니다. 게다가 이자벨의 남편인 가스통 역시 기관지염으로 거의 삼주간이나 침대에 누워있어야했다고 합니다. 부부가 건강이 너무나 나빴기에 공적이 생활을 할수 없었고 둘은 공적 생활을 중단해버립니다.


이자벨


문제는 당시 브라질이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는데 섭정과 그녀의 남편 둘다 공적생활을 거부했기에 브라질은 더욱더 혼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브라질은 황제 페드루 2세가 복잡한 상황을 봉합해주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존경받던 황제의 권위에 모두가 머리숙였던 것이었죠. 하지만 이자벨이 이런식으로 자신의 의무를 놔버리게 되자 황실에 대한 존경심은 줄어들었으며 당연히 황제가 겨우 막고 있었던 문제들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물론 이자벨과 그녀의 남편에 대한 비난 역시 커지게 되죠.


1877년 페드루 2세가 귀국했으며 그는 자신이 나라를 떠나있던 때 브라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는 딸인 이자벨은 물론 내각 누구에게서도 브라질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것입니다. 아마 페드루는 이때 딸과 사위에 대해서 실망감을 느꼈을 듯합니다. 어린시절부터 황제라는 의무를 받아들였던 페드루에게 이런 행동이야 말로 무책임한 것일듯합니다. 어쨌든 이자벨은 아버지가 돌아왔기에 섭정의 의무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영지에 머물렀으며 곧 둘째 아들인 루이지를 낳습니다. 그리고 가족은 장남인 페드루의 치료를 위해서 모두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죠. 그리고 유럽에서 3년 반을 머물게 됩니다. 이자벨은 정치 상황에 연관되길 원치 않았으며 유럽에서는 정치상황에서 벗어날수 있었죠. 페드루의 상태는 나아졌으며 이자벨은 셋째아들을 낳은 후에야 브라질로 돌아갔기에 3년 넘게 유럽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딸인 이자벨 부부와 함께 있는 페드루 2세 부부

1870년대


하지만 브라질의 상황은 점차 더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