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71)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 : 파벨 1세의 딸 (두번째)

엘아라 2018. 7. 1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71)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 : 파벨 1세의 딸 (두번째)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lexandra Pavlovna of Russia, 

Александра Павловна

(9 August 1783 [OS 29 July] – 16 March 1801 



1793년 알렉산드라의 큰오빠인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이 바덴의 루이제와 결혼했고 그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스웨덴에서 스텐보크 백작이 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혼담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라는 스웨덴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장래에 스웨덴으로 시집갈것을 대비하게 되죠.



알렉산드라 여대공


1794년 러시아와 스웨덴과의 협상은 잘 진행되어갔고 여제는 흡족해서 사촌이자 스웨덴의 섭정이었던 쇠데르만란드 공작(후에 스웨덴의 칼 13세)에게 흡족해하는 편지를 보냈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합의되지는 않았고 특히 종교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이때문에 스웨덴에서는 다른 신부후보 역시 고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1795년 11월에는 다른 신부후보였던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루이제 샤를로테와의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교회에 공지가 됩니다.(이것이 에전에 읽었었는데 뭐 대충 결혼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공고하는 의식이라던가..뭐 그런 의식이었습니다. 참고로 현재도 그 공고하더라구요 -0-;;;) 


여제는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내고는 손녀에게 그깟 국왕따위는..이라고 무시했지만 열받아서 공식 약혼발표를 수용하길 거부하고 결혼을 훼방놓으라고 할 정도였다고합니다. 하지만 신부가 스웨덴으로 도착하기전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마음을 바꿔서 약혼을 깨버렸고 1796년 러시아와의 혼담을 진행하기 위해서 직접 러시아로 오게 됩니다. 러시아로 온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알렉산드라는 첫눈에 사랑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둘의 결혼은 전혀 문제가 될것이 없어보였습니다. 특히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알렉산드라가 개종하지 않고 그대로 정교회를 믿어도 된다고 승락했을때가 아마 혼담의 절정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곧 공식 약혼이 발표될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스웨덴쪽에서 약혼을 미뤘고 결국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알렉산드라의 개종 문제를 들어 결혼을 거부하고 러시아를 떠나버립니다. 아마 이 상황은 알렉산드라에게 큰 충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카테리나 2세에게도 큰 충격으로 스웨덴 국왕이 떠난 2달만에 예카테리나 2세는 사망하게 됩니다. 에카테리나가 죽은뒤 그의 아들이자 알렉산드라의 아버지인 파벨이 계속해서 결혼협상을 진행했지만 결국 혼담은 성사되지 않았고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알렉산드라의 사돈이었던 바덴의 프레데리케와 결혼해버립니다. 이것은 알렉산드라와 다른 가족들이 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이자 바덴의 프레데리케의 언니였던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를 싫어하게 된 원인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바덴의 프레데리케


혼담이 깨진 3년뒤인 1799년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다시 혼담이 진행됩니다. 이번에는 합스부르크가의 대공이었는데 이 혼담을 구상한 것은 알렉산드라의 외삼촌들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 프랑스 공화국의 위협에 대항해서 러시아와 합스부르크가문이 동맹을 맺으려고 하는것이었죠. 그 동맹을 위해서 알렉산드라와 황제 프란츠 2세의 동생이었던 헝가리의 팔라틴(총독)인 요제프 대공이 서로 결혼하기로 합니다. 


1799년 2월 요제프 대공은 러시아로 와서 신부가 될 알렉산드라 여대공을 만났고 둘의 만남은 성공적이었기에 결국 약혼이 공식적으로 발표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가톨릭이었지만 알렉산드라는 개종하지 않고 정교회를 믿기로 결정했엇습니다. 둘은 1799년 10월 가트치나에서 결혼했습니다. 



파벨 1세와 두아들 그리고 큰 사위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결혼후에 남편을 따라 빈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냉대를 받게 되는데 알렉산드라 여대공은 그녀의 이모이자 프란츠 2세의 첫번째 아내와 너무 많이 닮아서 큰동서가 질투했을뿐만아니라 러시아 여대공으로 엄청난 혼수를 해왔고 이런 호화로운 장신구들 역시 황후의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이를테면 여대공이 한 무도회에서 아름다운 드레스와 화려한 장신구를 하고 나타나자 황후가 그것들을 떼어네고 다시는 걸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라가 꽃으로 장식하고 나타나서 아름다움을 더 빛나게 하자 황후는 더 화를 냈다고 합니다.(한마디로 꼬투리 잡는 큰동서) 그녀의 남편인 요제프 대공은 이런 공격에서 아내를 보호할수 없었기에 알렉산드라는 무척이나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가톨릭을 믿는 빈 궁정에서 정교회를 믿었기에 종교적으로도 고립되어있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사 황후

알렉산드라의 큰동서


다행히도 요제프 대공은 헝가리로 가야했기에 빈의 궁정에서 지낸 날들은 길지 않았고 알렉산드라는 남편과 함께 헝가리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곧 첫번째 아이를 임신하는데 임신기간동안 알렉산드라는 매우 힘들게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1801년 3월 딸을 낳았지만 몇시간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8일후에 알렉산드라 여대공 역시 산욕열로 17살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녀가 죽은 그주에 그녀의 아버지인 파벨 대공 역시 사망했기에 러시아 황실 가족들은 이 두가지 사실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헝가리식 복장을 하고 있는 알렉산드라 여대공


그녀는 죽은 뒤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홀대를 받았는데 그녀는 가톨릭이 아니었기에 가문의 영묘에 묻힐수 없었고 그녀의 남편이 영묘를 만들기 전에는 묻힐수도 없다가 1803년에 영묘를 만들고 나서야 묻힐수 있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라의 남편

요제프 대공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