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요즘 명란전때문에 상태가 메롱한데 안그래도 지인께서 "야 차라리 명란전을 다 끝내고 글을 써"라고 하시더군요.ㅠ.ㅠ 저 올해 초까지 알차게 글쓸 계획을 세워놨었거든요..ㅠ.ㅠ 그런데 정신차려보니..흑
(더 중요한 것은 그 지인께서 명란전을 읽으시고는 매일 번역한것 내놓으라고 하신다는...-0-;;;;)
덕분에 집중이 잘 안되서 글이 잘 안 읽혀요..ㅠ.ㅠ
스코틀랜드의 왕비들...(24)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 제임스 3세의 왕비 (첫번째)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제임스 3세의 왕비
Margaret of Denmark
Margrete av Danmark
(23 June 1456 – 14 July 1486),
제임스 3세와 마거릿 왕비
자주 노르웨이의 마르그레테 라고도 알려지고 영국에서는 "마거릿"이라는 이름으로 열려진 덴마크의 마르그레테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크리스티안 1세와 그의 아내인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마르그레테의 부모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세와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
마르그레테의 아버지인 크리스티안 1세는 올덴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처음으로 덴마크 국왕이 된 인물이었는데 그가 덴마크 국왕이 된 것은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으며 더 중요한것은 그가 덴마크 국왕이 되면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이 생기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크리스티안 1세가 국왕이 될 당시 북유럽의 세 나라였던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가 같은 국왕의 지배를 받던 "칼마르 동맹"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세 나라의 상황에 따라서 같은 시기에 같은 국왕이 통치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시기 주로 덴마크의 국왕이 다른 두 나라를 통치하는 형태였기에 스웨덴의 귀족들은 외국인 통치자가 통치한다는 불만이 있었고 자주 외국인 국왕에 대해서 저항하거나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크리스티안 1세도 덴마크와 노르웨이와는 달리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시기는 더 짧게 됩니다.
사실 이 칼마르 동맹이 성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직계 왕위계승자가 단절되면서였습니다. 이후 여러 친척관계와 주변의 강력한 군주들의 관계를 통해서 왕위계승자를 뽑았는데 이 왕위계승자들도 자주 후계자를 얻지 못했고 그러면서 왕위계승 문제는 더욱더 복잡해지게 됩니다.
올덴부르크 백작이었던 크리스티안 1세가 덴마크 국왕이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슐레스비히 공작이 그의 외삼촌이었기 때문입니다. 슐레스비히 공작이자 홀슈타인 백작이었던 아돌푸스는 덴마크 내에서 가장 큰 영지를 가진 영주였기에 강력한 왕위계승후보였지만 자녀가 없었기에 조카인 올덴부르크 가문의 크리스티안을 왕위계승차로 밀었고 결국 그가 크리스티안 1세가 됩니다. 크리스티안 1세가 덴마크의국왕이 되면서 복잡한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 문제는 슐레스비히 공작은 덴마크 국왕의 봉신이었지만 홀슈타인 백작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봉신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두 영지를 한사람이 상속받았고 그 상속자가 바로 샤우엔부르크 가문이었죠. 문제는 샤우엔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였던 아돌푸스의 후계자가 크리스티안 1세였다는 것입니다. 슐레스비히는 상관이 없지만 홀슈타인의 경우 신성로마제국의 한주여서 홀슈타인의 영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봉신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덴마크 국왕은 황제와는 독립적 군주였고 이 상황은 너무나 복잡했고 결국 "리베 조약"을 맺게 됩니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하나의 영지로 상속되고, 덴마크 국왕이 이 영지의 상속자이긴했지만 홀슈타인은 덴마크의 영토가 아니기에 결국 덴마크 국왕 개인이 이 공작령을 상속받는 것으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복잡한 상황은 19세기 이후 당시 유럽의 최대 국제 문제였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가 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크리스티안 1세
마르그레테의 어머니인 브란덴부르크의 도로테아는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으로 브란덴부르크의 마르크그라프였던 요한의 딸로 그녀의 할아버지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으며 그녀의 아버지 역시 강력한 군주중 한명이었습니다. 도로테아는 정치적 목적으로 당시 덴마크등의 국왕으로 선출된 바이에른의 크리스토페르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토페르는 자녀없이 사망했고 도로테아는 과부가 됩니다. 이후 그녀는 다시 덴마크등의 국왕으로 선출된 크리스티안 1세와 결혼했었습니다. 도로테아는 두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중 세명이 성인이 되었는데 두 아들인 한스(요한)과 프레데릭은 국왕이 되었고 딸인 마르그레테는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된것이었습니다.
크리스티안 1세와 도로테아
마르그레테는 중세시대 많은 여성들처럼 기록이 많이 없으며 특히 성장과정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르그레테는 1460년 4살때부터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왕자와의 혼담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치적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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