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는 사람이 나오네요 흠...
하지만 기억이 안나는..ㅠ.ㅠ
스코틀랜드의 왕비들...(26) 잉글랜드의 마거릿 : 제임스 4세의 왕비(첫번째)
잉글랜드의 마거릿
마거릿 튜더
Margaret Tudor
(28 November 1489 – 18 October 1541)
마거릿 튜더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있는 잉글랜드의 마거릿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와 그의 아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친할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이름을 딴것이었습니다.
헨리 7세는 잉글랜드의 장미전쟁을 끝낸 인물중 한명으로 그의 가계는 매우 복잡합니다. 튜더가문은 사실 웨일즈 지방 출신으로 잉글랜드 왕가는 직접연결고리가 없던 가문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웨일즈 출신의 기사였을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할머니는 프랑스의 카트린느 공주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6세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첫번재 남편인 헨리 5세가 일찍 사망한후 두번째 남편인 오웬튜더와의 사이에서 헨리 7세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튜더를 낳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헨리 7세의 아버지인 오웬 튜더는 이부 형이었던 헨리 6세에 의해서 잉글랜드 궁정에서 성장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헨리 7세
마거릿의 아버지
헨리 7세가 잉글랜드 왕가와 직접적으로 연결될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때문이었습니다. 보퍼트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자 헨리 4세의 아버지였던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그의 세번째 아내였던 캐서린 스윈포드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이룬 가문이었습니다. 캐서린 스윈포드는 공작의 오랜 정부였고 아이들은 모두 오래도록 공작의 적자가 아니었습니다만, 결국 공작은 두번재 아내가 죽은뒤 캐서린 스윈포드와 결혼했고 아이들은 적자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보퍼트" 라는 성을 썼었죠. 보퍼트 가문은 랭카스터 가문의 방계 가문으로 특히 헨리 5세와 헨리 6세 시절에 굉장히 중요한 가문으로 부상했습니다. 헨리 7세의 어머니였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랭카스터 공작의 증손녀였을뿐만 아니라 할머니인 마거릿 홀랜드를 통해서 에드워드 1세의 후손이기도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헨리 6세가 자신의 동생이었지만 잉글랜드 왕위계승권리와 관계없던 동생 에드먼드를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헨리 7세의 어머니
마거릿의 할머니
특히 장미전쟁중에 랭카스터 가문이나 보퍼트 가문의 남성직계가 완전히 단절되자 여성후손들의 지위가 중요해졌는데 랭카스터 공작과 캐서린 스윈포드의 장남의 장손녀였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지위는 매우 중요해집니다. 게다가 그녀는 엄청난 재산의 상속녀였고 궁정에서도 지위가 있는 여성이었기에 설령 랭카스터 가문의 후손이라도 요크 가문에서 함부로 할수없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후에 스스로 "레지나"라고 서명할정도로 야심이 많았던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가 아들인 헨리 튜더를 왕위계승자로 만들게 힘썼고 결국 헨리 튜더는 무력으로 요크 가문의 국왕인 리처드 3세를 꺽고 왕위에 올라서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헨리 7세는 당대에는 어머니의 계승권리를 통해서 왕위를 주장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무력으로 잉글랜드를 점령한 것이었습니다. --- 예전에 보퍼트 가문의 남성 후손과 리처드 3세의 Y염색체 매칭이다르다는 기사가 나온후 왕실의 반응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헨리 7세의 혈통과는 무관하게 왕위계승이 정당하다정도라죠 )
마거릿의 어머니였던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요크 가문 출신의 국왕 에드워드 4세와 그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첫번째 딸이었습니다. 에드워드 4세는 요크 공작의 아들이었습니다만 그의 아버지는 헨리 6세의 측근들과 불화하기 시작하면서 왕위계승을 주장하게 됩니다.(요크공작은 랭카스터 공작의 동생의 후손이었지만 복잡한 혈연관계로 모계를 통해서 랭카스터 공작의 형의 후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왕위계승을 주장한..-0-;;;) 재미난 것은 에드워드 4세의 어머니는 시슬리 네빌로 랭카스터 공작과 캐서린 스윈포드의 외손녀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집안싸움이라는...-0-;;;)
요크의 엘리자베스
마거릿의 어머니
에드워드 4세는 결국 워릭백작의 도움으로 왕위를 얻게 되지만 아름다운 과부였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면서 둘 사이가 틀어져버리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원래 기사의 딸이었지만 그녀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는 유럽의 통치가문의 일원으로 원래 헨리 5세의 숙모이기도 햇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뒤 만난 기사인 리첟드 우드빌과 사랑에 빠졌고 결국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 큰딸이 바로 엘리자베스 우드빌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당대 브리튼섬 최고의 미녀라고 알려질 정도였었으며 출신가문답게 랭카스터 가문의 가신과 결혼했었습니다. 장미 전쟁중 남편을 잃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요크 국왕인 에드워드 4세를 만나서 둘은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었죠.
에드워드 4세
마거릿의 외할아버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등장은 사실상 요크가문을 내분으로 몰아넣게 만들었으며, 결국 리처드 3세가 권력을 잡고 즉위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에드워드 4세의 적자 아들들이 모두 런던탑에서 사라진뒤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에드워드 4세의 장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왕위계승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노린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가 아들인 헨리 튜더와 요크의 엘리자베스간의 혼담을 성사시켰으며 렌리 튜더가 리처드 3세를 전투에서 물리친뒤 요크의 엘리자베스 와 결혼하면서 후손들의 왕위계승권리를 확보하면서 장미전쟁은 끝나고 튜더가문이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된것이었습니다. (물론 헨리 7세는 왕위계승권리가 높은 요크가문 왕족들을 모두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
마거릿의 외할머니
당대에 여성 왕족들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했는데 동맹을 원하는 상대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거릿 역시 여섯살이 되기전 아버지인 헨리 7세는 스코틀랜드와의 평화를 위해서 딸을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4세와 결혼시키기위한 협상을 진행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왕위계승을 요구하던 퍼킨 워백을 지원하던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퍼킨 워백은 스스로를 웨드워드 4세의 둘째 아들인 슈르스버리의 리처드라고 주장하면서 왕위를 주장햇던 인물이었습니다. 재미난것은 마거릿의 할머니인 레이디 마거릿은 어린나이에 결혼해서 애를 낳느라 더이상 아이를 가질수 없었기에 손녀가 어린나이로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었다고 합니다.
결국 1502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서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으며 그 보증으로 헨리 7세의 딸인 마거릿이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4세와 결혼하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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