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이야기 많은 사람이 또 나왔습니다. --;;;
음냐 그래도 읽어놓은 것이 좀 있으니 편하게 쓸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살짝합니다. -0-;;;;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56)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 파벨 1세의 아내(첫번째)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러시아의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
파벨 1세의 황후
Maria Feodorovna
(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25 October 1759 – 5 November 1828)
1770년
후에 파벨 1세의 두번째 아내이자 황후가 되는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원래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마리 도로테아 아우구스테 루이제라는 이름으로 1759년 당시 프로이센 왕국령이었던 슈테틴에서 뷔트템베르크의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과 그의 아내인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레데리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뷔르템베르크는 독일의 오래된 가문중 하나로 11세기 까지 올라가는 가문입니다. 15세기에는 공작령이 되었으며 이후 19세기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이후 뷔르템베르크 왕국이 되죠. 조피 도로테아의 오빠인 프리드리히 1세가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첫번째 국왕이기도 했습니다. 뷔르템베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남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오래도록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중요한 요충지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바로 오스트리아로 갈수 있는 곳이었기에 부르봉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서로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뷔르템베르크도 중요해졌었다고 합니다.
뷔르템베르크 가문의 문장
조피 도로테아의 아버지였던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은 원래 위로 형들이 둘이나 있었기에 상속받을 재산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들들은 대부분 군인이 되거나 성직자가 되어서 자신이 살 길을 개척했는데 프리드리히 오이겐 역시 군인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그는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 밑에서 복무했었으며 7년 전쟁이후에는 고향인 뷔르템베르크로 돌아와 일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들이 많이 있었지만 다른 형제들에게는 적자 아들이 없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와 그의 아들들이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기에 뷔르템베르크에서 정착했었던듯합니다.
조피 도로테아의 아버지
뷔르템베르크의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조피 도로테아의 어머니는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레데리케였습니다. 프레데리케는 호엔촐레른 가문의 분가였던 브란덴부르크-슈베트 가문의 출신으로, 프레데리케의 어머니인 프로이센의 조피 도로테아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이기도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신의 여동생들이나 조카들을 정략결혼을 많이 시켰는데, 여동생들을 호엔촐레른 가문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호엔촐레른 가문의 분가쪽으로 시집보냈었고, 프레데리케의 어머니 역시 분가였던 브란덴부르크-슈베트 가문으로 시집간것이었습니다.
조피 도로테아의 어머니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레데리케
이름이 낯익다 했더니 스웨덴의 로비사 울리카 왕비가 매번 며느리감으로 점찍었던 필리피네가 바로 이 프리데리케의 여동생이군요 -0-;;;;
아마도 프레데리케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였으며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이 프리드리히 대왕 밑에서 복무했었기에 둘이 결혼할수 있었던듯합니다. 재미난것은 프레데리케와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이 결혼하기 10년전 프리드리히 대왕의 또다른 조카였던 브란덴부르크-바이로트의 엘리자베트 프레데리케가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의 형이자 뷔르템베르크의 공작이었던 카를 오이겐과 결혼했었습니다. 물론 둘의 결혼은 매우 불행했었고 결국 결혼은 별거로 끝났었다고 합니다.
조피 도로테아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열두명으로 열한명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여기에는 뷔르템베르크의 국왕이 되는 프리드리히 1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의 첫번째 아내였던 엘리자베트등이 있습니다.
뷔르템베르크의 프리드리히 1세
조피 도로테아의 오빠
..--;;초상화를 보니까 이양반 마누라를 죽도록 때려서 마누라가 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2세의 방으로 도망갔고 여제가 대놓고 뭐라 그래서 조피 도로테아가 투덜댔다는 그양반이군요 -0-;;; 헐...
조피 도로테아가 태어났을때 그녀의 아버지는 아직 뷔르템베르크의 계승자가 아니었으며 아버지가 주둔하는 곳을 따라 다녔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피 도로테아가 10살때였던 1769년 그녀의 아버지가 뷔르템베르크로 돌아가면서 조피 도로테아와 그 형제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가문의 영지중 하나였던 몽벨리아르에 거주하게 됩니다. 몽벨리아르는 프랑스에 있었지만 뷔르템베르크 가문의 영지였다고 합니다.
조피 도로테아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뷔르템베르크에서도 중요한 지위에 있었기에 다양한 사람들이 조피 도로테아가 살던 몽벨리아르에 방문하게 됩니다.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이런 경향은 강해졌을 것입니다. 왜냐면 조피 도로테아의 두명의 백부들에게는 후계자가 될 적자 아들이 없었던 반면, 조피 도로테아의 아버지에게는 아들만 다섯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뷔르템베르크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 조피 도로테아의 아버지와 그 아들들임이 명확해졌기 때문일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몽벨리아르의 거처는 문화적으로 중심지가 되었죠.
조피 도로테아
결혼하기 전
조피 도로테아는 이런 가족의 헤택을 받고 자라게 됩니다. 주변에 많은 뛰어난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문화적으로도 중심지였기에 조피 도로테아는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으며, 평생 예술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교육을 잘받았는데 후에 독일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라틴어를 할줄 알았다고 합니다. 또 그녀는 의지가 강하고 사려깊고 상냥한 성품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7살때쯤의 그녀는 키크고 풍만하고 붉은 뺨의 밝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조피 도로테아는 러시아 황실과 별로 인연이 없어보였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가 처음으로 며느리감을 찾았을때 그녀는 겨우 14살로 적당한 신붓감이 아니었었습니다. 그래서 더 적합한 여성이었던 헤센-다름슈타트 의 빌헬미네가 미래 러시아의 황후로 선택되었었죠. 그리고 혼기에 이르자 조피 도로테아에게 혼담이 진행되었는데, 상대는 헤센-다름슈타트의 루드비히로 바로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된 빌헬미네의 오빠였습니다.
1776년 조피 도로테아는 헤센-다름슈타트의 루드비히와 약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약혼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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