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48) 예카테리나 2세 : 표트르 3세의 황후(첫번째)

엘아라 2018. 1. 2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한일 많은 예카테리나 2세입니다.

음냐..그리고 이제 안정적으로 이름 읽을수 있는 사람들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여대공들 이름이야 그냥 이름 더하기 부명이니 어려울것없고, 대공비나 황후들도 거의 대부분 독일 출신이니...음냐...


...ㅠ.ㅠ 그런데 이렇게 읽을거 많은 사람들은 너무 힘들어요..

(라고 말하지만 정작 몇번 쓴것같은데 기억이 안나는...ㅠ.ㅠ)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48) 예카테리나 2세 : 표트르 3세의 황후(첫번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예카테리나 대제

안할트-제르브스트의 조피

Catherine II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 (Yekaterina Alekseyevna) 

(2 May [O.S. 21 April] 1729 – 17 November [O.S. 6 November] 1796),

 Catherine the Great (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Yekaterina Velikaya),

 Princess Sophie of Anhalt-Zerbst,

1742년 경


후에 남편인 러시아의 표트르 3세를 몰아낸뒤 스스로 황위에 올랐던 예카테리나 2세는 원래 독일 출신의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안할트 제르브스트의 조피라는 이름으로 안할트-제브르트스의 아우구스트와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요한나 엘리자베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조피는 안할트 지역을 통치했던 아스카니아 가문 출신입니다. 아스키니아 가문은 안하트 지역을 오래도록 통치한 가문으로 가문의 조상에 대한 기록은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들은 상속을 통해서 여러 지역을 통치하는데 브란덴부르크 지역을 통치하는 등을 했습니다. 직접적으로 아스카니아 가문이 성립되는 것은 12세기였으며 이들은 브란덴부르크 마르크그라프령은 물론 작센 공작령을 두고 겔프가문(후에 작센쪽과 브라운슈바이크,하노버 영국 왕가 등을 이루는 가문) 다툼을 벌일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가문의 세력은 줄어들게 되었고 안할트 지역만 남게 되죠.



13세기 스카니아 가문 출신으로 작센의 공작이었던 베르나르트 3세의 문장



아스카니아 가문은 13세기 안할트 공령을 손에 넣고 이후 계속해서 안할트 지역을 통치하게 됩니다. 이때문에 이 가문은 주로 "안할트 가문"이라고 불리게되죠. 많은 독일의 통치 가문들처럼 안할트 가문도 장자상속제가 아닐때 수많은 지역으로 나뉘었으며, 다른 상속을 통한 영지 확장이 적었기에 아마도 이런 분할은 가문의 힘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영지를 나눠주는 상속을 반복할경우 가문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한쪽이 상속인이 없을시에 다른 가문이 영지를 쪼개서 상속하는데 이 경우에도 이전 통치와는 전혀 다른 통치를 받게 되는 복잡한 정치문제가 있었기에 영지에 대한 통치력이 약화될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또 안할트 가문은 종교개혁과도 연결이 되면서 가문의 영지를 잃었다 되찾았다를 반복하면서 더욱더 가문의 힘이 약해지게 됩니다.


18세기 안할트 공령, 색깔들이 다른 것은 각각 분가의 영지들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초록색이 안한트-제르브스트의 영지였습니다.



조피의 아버지였던 안할트-제르브스트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는 안할트-도른부르크의 요한 루드비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안할트-도른부르크를 공동으로 상속받았으며 이후에는 후계자 없이 사망한 사촌의 뒤를 이어 역시 안할트-제르브스트를 공동으로 상속받게 되죠. 이런 복잡한 상속관계는 아마도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가 프로이센 군에서 군인으로 복무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 당시 작은 가문의 상속영지가 적거나 없는 군주들은 이렇게 군인으로 일하면서 또다른 기회를 노리기도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팔츠-츠바이브뤽켄-비르켄펠트 공작의 아들이어썬 막시밀리안 요제프는 형이 있었으며 영지도 매우 작았기에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 군에서 복무하기도 했었습니다. 조피의 아버지는 뛰어난 군인으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에게 프로이센 육군에서 장교가 오를수 있는 최고의 지위인 Generalfeldmarschall 를 부여할 정도였었습니다.


조피의 아버지

안할트-제르브트의 크리스이안 아우구스트


조피의 외가는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의 방계 가문이었습니다.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은 덴마크 왕가의 분가중 하나로 16세기 덴마크의 국왕 프레데릭 1세의 아들인 아돌프가 아버지로부터 홀슈타인-고토로프 지역을 물려받으면서 생긴 분가입니다. 홀슈타인 지역은 사실상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으로 묶여서 덴마크 국왕에게 상속되던 영지였고 그 일부를 아돌프가 물려받은 것이었습니다. 이후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은 덴마크와는 독립적인 군주가 되기 위해서 덴마크 왕가와 적대적이 되고, 덴마크의 숙적이었던 스웨덴 왕가와 통혼을 하면서 후에는 스웨덴 왕위를 얻었습니다. 홀슈타인-고토로프의 본가의 가문은 통혼을 통해서 스웨덴과 러시아 가문과 연결이 됩니다. 스웨덴의 공주이자 칼 11세의 딸이며 칼 12세의 누나였던 헤드빅 소피아는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인 프리드리히 4세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는 외아들인 카를 프리드리히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카를 프리드리히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의 딸이었던 안나 페트로브나와 결혼해서 페타르 울리히를 낳았죠. 이 아들이 바로 예카테리나의 남편이 되는 표트르 3세입니다.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의 문장



조피의 어머니인 요한나 엘리자베트는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이었던 크리스티안 알베르트의 손녀이자 공작 프리드리히 4세의 조카였습니다. 요한나 엘리자베트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4세의 동생으로 에틴 지역을 물려받았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였습니다. 이때문에 예카테리나와 그녀의 남편인 표트르 3세는 육촌관게였기도 합니다. 홀슈타인-고토로프의 본가쪽에는 아들들이 한명뿐이었지만 요한나 엘리자베트에게는 오빠와 남동생들이 많았습니다. 이때문에 표트르 대제는 큰딸인 안나는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과 결혼시켰고 둘째딸인  옐리자베타는 요한나 엘리자베트의 오빠인 칼 아우구스투스와 결혼시키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칼 아우구스투스는 옐리자베타와 결혼전 사망했고, 옐리자베타의 부모 역시 사망하면서 엘리자베타는 자신에게 걸맞는 혼처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 법적으로는 독신으로 지내기로 결정하게 되었죠.



여대공 시절의 옐리자베타 여제

1720년대



재미난것은 이런 가족 관계는 스웨덴 왕위계승문제와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웨덴에서는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과 그 남편인 프레데릭 1세 사이에서 후계자가 없게되자 후계자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페타르 울리히(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의 조카)였지만 그는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이기도 해서 역시나 후계자가 없었던 이모 엘리자베타 여제에 의해서 러시아의 황위계승자가 되어있었죠. 숙적인 러시아의 군주를 국왕으로 받아들일수 없었던 스웨덴은 결국 다른 군주 후보를 찾아야했는데 이때 옐리자베타 여제는 조카의 상속영지가 될수 있었던 스웨덴을 조카의 가문에 남기고 싶어했었던듯합니다. 그래서 엘리자베타 여제는 조카의 오촌이자 요한나 엘리자베트의 오빠였던 아돌프 프리드리히를 스웨덴 국왕으로 지지합니다 게다가 그는 옐리자베타의 죽은 약혼자의 동생이기도 했었죠. 


조피의 어머니인 요한나 엘리자베트는 볼펜뷔텔에서 대모였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부인인 엘리자베트 조피 마리에 의해 성장했었습니다. 아마도 자녀가 없었던 공작부인은 요한나 엘리자베트를 양딸로 삼았던듯한데 요한나 엘리자베트의 혼처는 물론 혼수도 공작부인이 다 마련했었다고 합니다. 요한나 엘리자베트는 남편과 20살 이상 차이가 났었으며 아마 화려한 궁정에서 살다가 남편을 따라 작은 군 주둔지로 갔언 요한나 엘리자베트는 매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시기에 첫딸인 조피를 낳았는데 이때 거의 죽을뻔하기 까지 했었는데 아마도 이런 상황은 요한나 엘리자베트가 딸을 그다지 예뻐하지 않았던 계기가 되었으며 딸을 질투하고 자신의 아래에 두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요한나 엘리자베트

아마 딸이 결혼한 뒤일듯..

왜냐면 요한나가 하고 있는 훈장이 성 예카테리나 훈장이거든요.


조피는 네명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만 유일하게 성인으로 성장한 동생은 남동생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밖에 없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