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50) 예카테리나 2세 : 표트르 3세의 황후(세번째)

엘아라 2018. 2. 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0-;; 지금 생각으로는 다섯편내지 여섯편 생각중인데 ..ㅠ.ㅠ

더 될수도 있습니다...(이상하게 글이 제 맘대로 분량이 안되더라구요..ㅠ.ㅠ)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50) 예카테리나 2세 : 표트르 3세의 황후(세번째)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예카테리나 대제

안할트-제르브스트의 조피

Catherine II 

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 (Yekaterina Alekseyevna) 

(2 May [O.S. 21 April] 1729 – 17 November [O.S. 6 November] 1796),

 Catherine the Great (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Yekaterina Velikaya),

 Princess Sophie of Anhalt-Zerbst,



러시아에서 희망을 봤다고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예카테리나의 러시아에서의 삶은 쉽지만은 않은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카테리나는 남편인 표트르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결혼으로 러시아로 온 에카테리나가 남편과의 사이가 나쁜것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에서의 삶이 그리 평탄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었습니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아마 첫인상마저 나빴던 예카테리나와 달리 표트르는 처음에는 그녀를 아내로 받아들이려했었던듯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싫어하는 것을 알게 된 표트르 역시 결국은 아내와의 사이가 점차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

1745년경


하지만 둘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나게 되는데, 옐리자베타 여제는 예카테리나에게 "후계자를 낳아야한다"리고 압력을 가했으며 결국 예카테리나는 궁정에 남아있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결국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고 결혼 9년만에 아들 파벨을 낳습니다. 아들이 태어나자 옐리자베타 여제는 이제 후계자가 태어난 것에 안심을 했으며 파벨이 진정한 표트르 대제의 후계자가 되길 바랬다고 합니다. 어쨌든 옐리자베타 여제는 아이를 자신에게로 데려와 교육시켰었습니다. 물론 여제가 어린 아이를 살갑게 대했다거나 그랬던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훗날 예카테리나 역시 아들에대해서 그리 다정하게 대하지 않았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훗날 아들인 파벨에게 친아버지가 표트르가 아니라고 주장했었지만, 표트르의 외모나 아들에 대한 예카테리나의 차가운 반응등으로 볼때, 파벨은 표트르의 자식이 맞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파벨이 태어난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의 사이는 더 벌어졌으며 각자 애인들을 두고 지냈었습니다. 예카테리나는 1754년 딸을 낳는데 엘리자베타 여제는 이 딸을 표트르의 어머니인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의 이름을 따서 안나라고 지었습니다만 예카테리나는 안나라는 이름을 원치 않았었다고 합니다. 재미난 것은 표트르는 이때 안나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확신했었으며, 예카테리나는 어려서 죽은 이 안나에 대해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파벨 1세와 함께 있는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

1750년대



서로에 대해서 경계가 점차 심해지면서 부부는 정적에 가까운 사이로 변하게 됩니다. 표트르는 고향인 독일을 그리워했으며 러시아를 독일식으로 바꾸려했었습니다. 반면 예카테리나는 스스로 "러시아인"이 되었으며 러시아어를 배우고 러시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표트르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이 예카테리나 주변으로 몰려들게 되죠.


1762년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면서 표트르가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하지만 표트르의 정책은 러시아 귀족들의 불만을 초래하게 됩니다. 또 표트르는 러시아 정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를테면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냈던 많은 귀족들을 즉위후 그대로 석방했었는데 이에 대해서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들 조차 황제가 너무나 많은 자비심을 배푸는 것에 우려를 했었습니다. 또 표트르는 고향인 독일을 좋아했으며 이런 상황은 다 이긴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그만둬버리는 결정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군대등을 독일식으로 개편하려 했었는데 이것은 러시아 귀족들의 불만을 더욱더 초래하게 만들었으며, 표트르의 정적이자 황후였던 예카테리나 주변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계기가 됩니다.



표트르 3세

1762년


그리고 표트르 3세에게 귀족들이 반발하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표트르 3세가 근위대를 개혁하려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독일에서 병사들을 데려오려한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러시아 귀족들은 독일인들이 득세할 것을 우려했으며 결국 황제의 최대 정적인 황후인 예카테리나를 중심으로 음모가 진행됩니다. 1762년 7월 쿠데타가 일어났을때 대부분의 귀족들은 황제에게서 등을 돌렸으며 황후의 편에 섰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체포되어서 양위를 했으며 멀리 유배되었었는데 결국은 알렉세이 오를로프(예카테리나의 애인이었던 게오르기 오를로프의 동생)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알렉세이 오를로프


예카테리나는 실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바로 제위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표트르 3세가 죽었더라도 그녀가 제위에오르는 것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들중 하나는 표트르 3세 외에도 제위를 주장하는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반 6세였습니다. 옐리자베타 여제에 의해 쫓겨난 이반 6세는 이때까지도 유폐된채 살아있었는데 당연히 예카테리나보다는 훨씬더 황위계승에 명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반란을 일으킨 사람중에는 자신이 옐리자베타 여제의 딸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죠. 결국 이들은 결국 예카테리나가 즉위한뒤 처형당하게 됩니다.


예카테리나는 예카테리나 1세의 선례를 따라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는 귀족들의 꼭두각시였던 예카테리나 1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

대관식때모습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