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작년 이맘때쯤에 머리가 너무 아파서 뭐랄까 한달 내내 누워있었거든요 -0-;;;
그러고 나서 좀 괜찮았는데 올해도 기운없고 머리가 아프군요..흑...
음냐..너무 먹어서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0-;;;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13) 폭풍전야
남편이 죽은후 마리야에게는 자식들의 문제가 골치아픈 문제였다. 큰딸 미시는 시댁어른들이었던 루마니아의 카롤 1세와 엘리사베타 왕비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등이 맞물려 복잡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딸인 더키는 이혼후 키릴과 결혼했지만 러시아 황실에서 키릴과 더키를 용납하지 않으려 했고 이때문에 이들은 러시아로 갈수 없어서 유럽에서 살고 있었다. 또 막내딸인 베아트리스 역시 우여곡절끝에 결혼했지만 에스파냐 왕실에서 역시 이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역시 에스파냐로 갈수 없었다.
마리야의 네딸들
비, 더키, 산드라, 미시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녀들의 문제는 차츰 해결되었고 마리야는 자식들이 자리잡는 모습에 큰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미시는 점차 루마니아에서 안정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미시는 가정적 행복은 포기했지만, 대신 이제 자신의 조국이 된 루마니아를 위한 삶을 살기로 했고 이런 상황은 카롤 1세와 미시와의 관계를 좀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미시는 이제 어리고 낯선 외국인 신부에서 루마니아에서 인정받는 왕위계승자의 부인이 되었다. 마리야는 이런 딸의 모습을 기뻐했었다. 1910년대 미시가 자녀들을 데리고 왔을때 마리야는 외손자들이 자신과 너무 오래 떨어져 지냈기에 다정하게 지낼수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딸인 일레이나와 아들인 니콜라예와 함꼐 있는 미시
키릴은 오래도록 용서받지 못했었지만 1910년쯤 되면 상황이 바뀌게 된다. 니콜라이 2세의 계승자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인 알렉세이는 혈우병 환자였으며 동생인 미하일 대공은 시녀들이나 귀족 여성과 오래도록 연애관계에 있으면서 황실에서 원하는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고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숙부인 블라디미르 대공이 죽을 무렵 사촌이자 어쩌면 실질적 후계자가 될지도 모를 키릴을 용서하기로 했다. 더키는 결국 러시아 황실에서 인정을 받았고 "빅토리아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으로 키릴의 아내이자 러시아의 대공비로 정식 인정받았고 이제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당당하게 러시아로 돌아갔다.
키릴과 더키 그리고 둘의 딸인 마리야
마리야의 막내딸인 베아트리스 역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외손자도 태어났다. 베아트리스의 남편인 알폰소는 비록 에스파냐에서 추방당했지만 왕족이자 군인으로써의 임무를 수행하려했다. 마리야는 딸과 사위가 모로코에서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베아트리스와 알폰소 역시 에스파냐 왕실의 허락을 받고 에스파냐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들과 함께 있는 베아트리스
1910년대 초반 마리야는 이제 딸들이 자리잡아가는 모습을 보았고 흐믓함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러시아의 불안한 정치 상황에 신경이 쓰였을 것이지만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러시아가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 여겼다. 또 그녀는 독일 왕족이었으며 그녀의 나라였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령은 작은 나라로 정치적 문제가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는 나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폭풍 전야의 고용함에 지나지 않았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인 호엔베르크 공작부인이 암살당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제 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1차대전이야 말로 마리야가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고 누려왔었던 모든것은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