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10) 자녀들의 문제 그리고 남편의 죽음

엘아라 2018. 1. 1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제가 사실 편두통이 좀 많이 심하거든요. 

예전에 지인께서 그러시더라구요 "다음 세상이 있다면 날라리로 태어나겠어요"라고 하시길래 "전 다음 세상이 있다면 두통없는 삶을 살고 싶어요"라고 했었습니다.

뭐 두통이야 평생 달고 사는 거라서 사실 주변에 두통 없는 사람들이 너무 부럽더라구요.

(그런데 재미난것은 저는 병을 달고 사는데 제 주변에는 저랑 비슷한 병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드랩니다. -0-;;; 문득 "아 건강한 사람들 옆에 살아서 그나마 내가 버티는 건가?"라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0-;;)


하여튼 덕분에 지금 정신이 좀 몽롱합니다. -0-;;;;;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10) 자녀들의 문제 그리고 남편의 죽음


마리야는 코부르크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남편은 늘 바다와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말이다. 마리야가 살고 있던 코부르크는 작은 도시였고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령은 그리 크지 않은 나라였다. 이때문에 복잡한 러시아나 영국의 정치상황과는 거리가 멀었고 평온한 삶을 영위할수 있었다. 물론 마리야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는 자신이 러시아 여대공이며 영국 여왕의 며느리라는 점을 과시하면서 정치적으로 이를 이용했었다. 그렇기에 마리야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때마다 놓치지 않고 참석하려 했는데 여왕의 주빌리 행사나 조카였던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등이 그랬다.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때 마리야와 그녀의 가족들

남편과 아들,두딸인 미시와 더키 그리고 두 사위



마리야는 통치 군주의 아내이자 러시아 황제의 여동생,고모, 영국 여왕의 며느리라는 화려한 사회적지위를 누렸었다. 하지만 마리야의 가족문제는 점차 마리야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있었다.


마리야의 남편인 앨프러드는 코부르크에서의 삶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것은 곧 그가 점차 더 알콜에 의존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마리야는 이를 다른 가족들 특히 아이들에게 내색하지 않았었는데 큰 딸인 마리는 결혼하고서야 어머니가 아버지를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알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남편의 문제는 늘 참아왔던 문제였었지만 아이들의 문제는 마리야를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마리야의 첫째아이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던 앨프러드(영 애피)는 어린시절 부모와 떨어져 코부르크에서 교육을 받았었다. 이것은 그가 마리야의 다른 자녀들보다 더 어머니와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이들의 교육에 관여하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더 멀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영 애피가 점차 삐둟어져버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많은 왕족들과 아버지처럼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여자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스캔들은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들에게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리야 스스로도 이런 아들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점차 더 엇나가기 시작했고 차기 군주가 될 그와 신분이 맞지않는 여자들과 어울려서 어머니의 속을 태웠다.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프러드

마리야의 아들



영 애피의 행동뿐만 아니라 결혼한 딸들도 마리야의 걱정을 가중 시키게 된다. 마리야의 장녀인 미시는 루마니아로 시집갔지만 루마니아의 카롤 1세는 조카며느리이자 후계자의 아내였던 미시를 궁정에서 고립시켰다. 이것은 그녀가 루마니아 정치에 관여해서 루마니아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것을 우려해서였지만 겨우 17살에 시집간 미시에게 이런 생활은 매우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게다가 루마니아의 삶은 미시가 알던 삶과 너무나 달랐다. 이를테면 결혼 직후 임신해서 18살 전에 출산하게된 미시는 마리야나 영국의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때 의학적인 혜택을 덜 받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무통분만을 사랑했으며 마리야 역시 이를 지지했다. 하지만 루마니아에서는 이런 무통분만이 성경에 나오는 여성의 고통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해서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마리야는 루마니아로 가서 딸을 위해 싸웠지만 카롤 1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결국 미시의 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까지 나섰고 미시가 첫아이를 낳을때 영국 의사의 도움을 받을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미시가 궁정에서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미시의 남편인 페르디난트는 숙부인 국왕 카롤 1세에게 말한마디 못하는 인물이었으며 그가 아내를 위해 해줄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것은 마리야가 남편인 애피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결국 미시 역시 궁정에 있는 것을 힘들어했고 후에 이것은 그녀가 위안 받을 사람들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시는 스캔들과 남편때문에 루마니아에서 잠시 코부르크로 돌아와있기까지 했다.



미시


더키 역시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더키는 사촌인 에르니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이것은 전 유럽 궁정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이 맺어준 손주들이 불행하다는 사실에 슬퍼했지만 둘이 헤어지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고 더키는 마지 못해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다. 



더키


마리야는 셋째딸인 알렉산드라(산드라)를 산드라보다 나이가 많았던 외교관인 호엔로에-랑겐부르크의 에른스트 2세와 결혼시켰다. 그는 할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이부언니였던 라이닝겐의 페오도라로 둘은 친척관계였을 것이다. 이 결혼은 마리야의 의지로 이뤄진것이었는데, 마리야는 자신이 원래 바랬던 지적이며 사교술이 좋은 외교관이었던 에른스트를 보고 알렉산드라와 잘 어울릴것이라 여겼다. 나이차도 많았기에 그가 어린 아내를 사랑해줄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산드라는 루마니아의 왕태자비나 헤센의 대공비가 된 언니들보다 낮은 가문으로 시집간것이 매우 불만스러웠다. 후에 산드라의 동생인 베이비 비는 에스파냐 왕가로 시집가는데 이 역시 산드라의 불만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비록 산드라는 독일에 남았고 어머니 곁에 있던 딸이었지만 이런 불만을 마리야가 모를리는 없었다.



산드라와 에른스트


이런 걱정거리를 안고 살고 있었지만 마리야의 삶은 그럭저럭 잘 버텨나가고 있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1899년 마리야와 앨프러드의 은혼식날의 비극은 마리야의 평온한 삶을 끝내게 되는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마리야와 앨프러드의 은혼식을 위해 가족들이 모였을때, 마리야의 아들인 영 애피가 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지만 결국 그 다음달인 1899년 2월 사망했다. 이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었지만 스캔들을 막기 위해 매우 조용히 처리 되었다. 영애피는 빨리 요양원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많은 가족들이 영애피가 어떻게 죽었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모두들 갑작스러운 영애피의 죽음에 당황해했었고 결국 사건의 전말이 조금씩 소문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앨프러드

마리야의 아들


이 사건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는데 앨프러드는 아들이 자살한것에 대해서 아내를 비난했다.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진 사람이 마리야였기 때문이었다. 마리야는 아마 남편이 이런 비난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고 그의 죽음은 그녀가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들은 부부의 은혼식때 자살했기에 더욱더 충격이 컸을 것이다. 영애피가 죽은뒤 여왕의 손자이자 마리야가 제일 좋아했던 시동생인 레오폴드의 아들인 찰스가 공작령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코부르크로 와서 교육을 받았으며 마리야는 이마도 그와 자주 교류를 했을 것이다.


아들이 죽고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다른 비극이 닥쳐온다. 바로 마리야의 남편인 앨프러드가 후두암에 걸린 것이었다. 앨프러드는 매우 고통스러워했으며 튜브를 삽입해야할 정도였다. 이런 남편을 곁에서 돌본 사람은 마리야였다. 아마도 마리야는 애증의 세월을 보내게 했던 남편이 죽어가는 것에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비록 오래도록 미워한 남편이었지만 이제 남편을 잃은 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았지만 마리야는 시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을 방문하면서 남편의 상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았던 여왕이 충격받을 것을 두려워했엇을 것이다. 결국 마리야의 남편인 앨프러드는 1900년 7월 잠을 자던중 사망했으며 그의 곁에는 아내인 마리야와 네딸들이 있었다.



형인 에드워드 7세, 동생인 코넛 공작 아서와 함께 있는 앨프러드


아들을 잃은 빅토리아 여왕은 아들을 잃고 남편마저 잃은 며느리인 마리야를 동정했다. 여왕은 생전에 세명의 자녀들을 잃었고 그 마지막이 앨프러드였다. 여왕은 나이가 들면서 옛날의 날카로운 시어머니의 모습에서 좀더 편안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남편을 잃은 슬픔을 평생 간직했었던 여왕에게 이제 남편을 잃은 며느리는 자신이 겪은 아픔을 다시 겪을 불행한 여인이었으며 슬픔을 함께할 상대였을 것이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