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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냐..ㅠ.ㅠ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9)두딸의 결혼 그리고 군주의 아내
마리야의 아이들을 성장하고 있었으며, 특히 마리야의 큰딸인 마리(미시)는 유럽의 여러 왕가에서 눈독을 들이는 공주로 성장했다. 미시의 결혼 문제는 마리야가 얼마나 영국 왕가를 싫어하는지 또 동서와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 그리고 남편의 의견을 안중에도 없어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마리야의 큰딸인 미시는 매우 예쁜 소녀였으며 결혼할 나이에 이르게 되자 여러 왕가에서 혼담을 넣게 되었다. 그중 에든버러 공작이 가장 좋아한 사윗감은 조카였던 웨일즈의 조지 왕자였다. 웨일즈 공의 둘째아들이었던 조지는 해군으로 몰타에 머물때 숙부의 집에 자주 머물렀으며 이때 어린 사촌 여동생들과도 잘 어울려줬었다. 그는 이 사촌 여동생들중 제일 예뻤던 미시에게 마음이 있었고, 미시가 어느정도 성장하자 모두가 그의 마음을 알만큼 대놓고 따라다녔었다.
에든버러의 마리(미시), 1893년, 결혼 직후 인듯
물론 조지의 마음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양쪽 부모들의 생각은 복잡하게 된다. 특히 서로 사이가 나빴던 조지의 어머니와 미시의 어머니는 미시와 조지에 대해서 서로 탐탁치 않아했다. 마리야는 싫어했던 영국으로 딸을 시집보내기 싫어했다. 조지의 어머니인 웨일즈 공비 알렉산드라 역시 미시를 그다지 탐탁치 않아했는데 싫어하는 동서의 딸이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 "독일적"이라는 것도 이유에 포함되었다. 독일에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알렉산드라는 미시가 독일에서 교육받은것이 탐탁치 않았으며 이때문에 이런 이유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라가 독일을 싫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때문이었는데 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후 덴마크는 국토의 1/3에 달하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을 뺏기게 되었으며 이때문에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난민 문제등이 발생했었기에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동생인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독일에 적개심이 강했고 이런 적개심은 영국과 러시아 황실에 그대로 전해지게 됩니다.)
웨일즈의 조지, 1893년
물론 마리야가 영국이 싫기만 해서 딸의 혼담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딸이 자신처럼 살것을 걱정해서 그랬을 가능성 역시 있었다. 왜냐면 그녀는 러시아의 게오르기 대공이 미시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했을때도 거절했다. 마리야는 러시아 황실 남성들의 일상적 부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잘생긴 러시아 대공들에 호기심을 가지는 딸들에게 "잘생긴 너희 사촌들이 문 뒤에서 하녀들과 무슨일을 하는지는 모를거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아마도 마리야는 자신의 실패를 딸이 물려받지 않길 바랬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사실 마리는 아직 어렸기에 조지가 마리를 따라다닌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892년 초 조지의 형인 에디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문제는 바뀌게 된다. 이제 조지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국의 국왕이 될 사람이었으며 결혼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조지는 당연히 그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미시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아버지들은 조지와 미시가 결혼하는 것에 대찬성이었다. 하지만 둘의 어머니들은 결사 반대였다. 마리야는 딸이 영국의 왕비가 되는 것조차도 싫어했었다. 결국 마리야는 딸에게 조지를 거절하라는 압력을 넣었으며 미시를 위한 혼처를 찾았다. 바로 루마니아의 왕태자였던 페르디난트였다. 그는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출신으로 카롤 1세의 조카이기도 했다. 마리야는 영국과 전혀 다른 분위기인 호엔촐레른 가문으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과 딸이 독일에 있는 자신을 자주 만날수 있다는 것과 비록 영국 왕비자리를 버렸지만 루마니아의 왕비로 만들수 있다는 기대감에 딸과 페르디난트의 혼담을 밀어붙였고 결국 1892년 약혼했고 1893년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에 대해서 빅토리아 여왕은 손녀의 결혼을 축복하긴 했지만 조지와 미시가 결혼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마리야의 남편인 앨프러드는 미시를 사랑했고 딸의 결혼에 눈물을 보였는데 아마도 복잡한 심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원했던 사윗감이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시키는 것에 대한 슬픔도 어느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결혼 직후의 미시와 난도(페르디난트)
미시의 결혼 뒤, 앨프러드와 빅토리아 여왕은 앨프러드의 둘째딸인 더키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은 마리야가 딸의 결혼에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고 딸의 결혼을 서둘렀는데 여왕이 점찍은 더키의 짝은 여왕의 외손자였던 헤센의 대공 에른스트 루드비히였다. 마리야는 역시 이 혼담에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알려져있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점찍은 신랑감이라는 거부감이 강했을 것이다. 하지만 헤센 대공은 마리야가 원하던 독일 군주였으며, 헤센 대공의 부모는 이미 사망했고 시누이들 대부분은 시집갔기에 더키가 시집간다면 헤센에서 자시의 마음대로 할수 있었다. 또 헤센 대공가문은 마리야의 외가이기도 했다. 결국 마리야는 더키의 혼담을 승락했고 더키와 에르니는 할머니와 부모의 뜻에 다라 1894년 결혼식을 올렸다.
더키와 에르니, 1894년, 결혼식날
미시의 결혼은 마리야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결혼이었으며 더키의 결혼은 앨프러드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결혼이었다. 하지만 이 두 결혼은 모두 불행한 결혼이기도 했었다.
미시가 시집 간 두달 뒤인 1893년 3월 앨프러드의 백부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인 에른스트 2세가 사망했다. 에른스트 2세가 죽은 뒤 마리야의 남편인 앨프러드는 이제 작센-코부르크-고타의 통치 공작이 되었으며 마리야는 통치 군주의 아내가 되었다. 마리야의 남편인 앨프러드는 평생 영국 해군으로 살았으며 바다에서의 삶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넓은 바다를 누비면서 엄청난 세력을 자랑하는 영국의 왕자로 살았던 그에게 작은 공작령은 너무나 답답한 곳이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령은 그리 크지 않은 영지에 정치상황도 평온했었다. 게다가 앨프러드는 영국 왕자로 자라났으며 독일의 공작령의 군주가 되기에는 너무나 "영국적인 사람"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리야는 남편과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마리야에게 통치 군주의 아내가 된것은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불만을 한번에 해소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녀는 통치 군주의 아내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었으며 왕위계승자의 부인인 동서보다 통치 군주의 아내인 자신의 지위가 더 높았다. 결국 마리야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이 된것에 매우 만족했으며 공작 영지에서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도 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빅키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리야가 이제 자신의 공작령에서 제일 높은 사람으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쓸정도였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앨프러드
1898년
마리야는 결혼한지 20여년이 지난 상황에서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문제인 남편이 있었으며 이제 그녀의 자녀들 역시 마리야의 걱정을 안겨주는 또다른 인물들이 되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