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11) 더키

엘아라 2018. 1. 1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제가 참조하는 책이 솔직히 마리야 황태후(알렉산드르 3세 황후) 전기를 쓸려다가 누가 써서 방향을 좀 바꿨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왜냐면 주로 러시아 이야기에 마리야 황태후 이야기가 많아요. 사실 그분이 이야기꺼리가 많지만..ㅠ.ㅠ

문제는 상대적으로 러시아랑 연결이 덜 되는 사람들 이야기는 줄어드는데 특히 마리야의 경우는 진짜 별 이야기가 없네요..ㅠ.ㅠ


1차대전전까지 몇줄 안나오는거보고 정말 당황스럽습니다.-0-;;;

어떻게든 쥐어짜야겠죠..ㅠ.ㅠ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11) 더키


20세기는 격동의 세기였으며 유럽의 왕족들은 이전의 세계와 너무나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의 친척들은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이런 경험을 미리하게 된다. 바로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 1월 가족들과 후손들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것이었다. 여왕의 죽음은 여왕의 후손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올 신호이기도 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 행렬



마리야의 둘째딸인 더키는 남편인 에르니와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었다. 그녀는 이런 불행한 결혼생활에 힘들어했는데 1896년 사촌인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보러 갔을때 러시아쪽 사촌인 키릴 블라디미르 대공을 만나게 된다. 더키와 키릴은 어린시절부터 알었지만 이때 만뒤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되었다. 하지만 더키는 할머니가 살아있는 한 이혼할수 없었고 마음을 다잡고 살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결국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이 끝난뒤 더키는 짐을 싸서 어머니에게로 와서 다시 돌아가지 않고 이혼하겠다고 선언했다.


더키의 이런 행동은 당대 왕족들에게 용납될수 없는 일이었으며 당연히 마리야 역시 딸의 이런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당시 왕족들에게 이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며 "차라리 죽는편이 더 낫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당연 마리야 역시 처음에는 딸의 이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더키는 자신의 힘든 상황 특히 에르니의 성적 취향에 대해 언급했으며 어머니로써 마리야 역시 딸의 이혼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친척들에게 더욱더 나쁘게 보였는데 친척중 한명은 마리야가 이혼을 지지하는것에 대해서 "자신이 반대한 결혼이었기에" 이혼에 대해 찬성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이혼과정은 매우 힘들었는데 특히 집에서 짐싸서 나가서 이혼을 요구한 더키에게 모든 비난이 쏟아졌으며 이런 더키를 지지해준 마리야에게도 역시나 비난이 쏟아진다. 게다가 더키의 남편인 에르니는 역시 결혼 생활이 불행했고 이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후에 이야기하지만, 이때는 이 문제에서 회피하기 위해 멀리 도망가있기까지 했다. 결국 더키와 에르니는 이혼했고 더키는 집에 돌아와서 지내게 된다.



더키


마리야는 더키가 사촌인 키릴과 재혼하길 원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키릴 역시 마리야가 원하는 사윗감은 아니었다. 마리야는 러시아 대공들의 바람기를 싫어했으며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로 영국식 교육을 받았던 딸이 전혀 다른 분위기의 러시아 대공들과 만나서 상처받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더키는 이혼후에 힘든 삶을 살았고 마리야는 아마도 딸을 위해 키릴과 더키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키릴과 더키의 결혼은 쉽지 않았는데 키릴과 더키는 사촌간이었으며 정교회는 사촌간의 결혼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키릴이 더키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짜르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런데 니콜라이 2세의 황후인 알렉산드라는 더키의 사촌이었을뿐만 아니라 전 시누이기도 했다. 비록 에르니의 큰누나인 헤센의 빅토리아는 더키와 에르니가 이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이해해줬지만, 다른 시누이들은 그렇지 않았으며 특히 알렉산드라 황후는 자신의 오빠가 모욕당했다고 생각했다. 이때문에 알렉산드라는 키릴과 더키의 결혼을 절대 인정해줄수없다고 주장했으며 아내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역시나 "(아이에게는 부모가 이혼하느니} 차라리 죽었던 것이 더 나을 것이다"라고 했었던 니콜라이 2세 역시 결혼을 인정해줄 마음이 없었다. 


만약 키릴이 짜르의 허락없이 결혼한다면 지위와재산 그리고 계승권까지 박탈당할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아직 니콜라이 2세에게 아들이 없었으며,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은 결혼전이었기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 3황위계승자였던 키릴역시 중요한 황위계승자 후보였기에 키릴의 부모 역시 더키와의 결혼을 원치 않았다.



블라디미르 대공 부부와 가족들

가운데가 키릴 대공



하지만 1905년경에는 상황이 많이 바뀌게되는데 먼저 니콜라이 2세에게 아들이 태어났으며, 해군이었던 키릴은 러일전쟁에 참전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키릴은 짜르의 허락없이 결혼하기로 결정했고 마리야의 집에서 1905년 더키와 키릴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이 결혼에 니콜라이 2세는 크게 화를 냈으며 키릴은 모든것을 뺏기고 추방당할 위기에 놓였지만 결국 군대 지위만을 뺏기고 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키릴과 더키


마리야는 딸이 이런 상황을 겪는 것에 대해서 힘들었지만 마리야를 힘들게 하는 자녀는 더키뿐만은 아니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