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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냐...-0-;;;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12) 베아트리스
마리야의 막내딸인 베아트리스 (비Bee) 역시 결혼문제 때문에 매우 말들이 많았으며 마리야는 이에 대해서 매우 걱정했을 것이다.
코부르크에서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와 남편 그리고 네딸들과 백모인 선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맨 오른쪽이 베아트리스입니다.
마리야의 막내딸인 베아트리스는 1902년 사촌이었던 러시아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사랑에 빠졌다. 미하일 대공은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로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이기도 했다. 둘은 매우 잘 어울렸지만 정교회가 사촌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황실에서는 결국 베아트리스와 미하일 대공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둘은 결국 반대를 극복하지 못했고 헤어지게 되었다. 아마 마리야 역시 러시아 황실 출신으로 신실한 정교회 신자였기에 사촌간의 결혼에 회의적이었을 것이며 게다가 딸들이 러시아 대공들과 엮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탐탁치 않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실연으로 너무나 힘들어했고 결국 마리야는 딸을 멀리 지중해로 여행을 보내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뒷날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베이비 비랑 미하일이랑 결혼시키는 편이 더 나았었죠.)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903년 겨울궁전 무도회때
미하일 대공과의 혼담이 물 건너 간뒤 베아트리스의 혼담은 다시 한번 진행된다. 이번에는 에스파냐 왕족이었다.1906년 마리야는 딸인 베아트리스를 데리고 에스파냐의 국왕 알폰소 13세와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제니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빅토리아 유제니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기에 베아트리스와는 사촌관게이기도 했다.이때 베아트리스는 인판타 아우랄리아의 장남인 알폰소(알리)를 소개받게 된다. 인판타 아우랄리아는 이사벨 2세의 딸이자 알폰소 12세의 여동생이고 알폰소 13세의 고모였다. 인판타 아우랄리아는 유럽에서 스캔들 메이커로 유명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매우 자유로웠으며 파격적이었기에 그녀의 자유로운 모습은 대중에게는 비난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답답한 왕실에서 자유를 찾으려하는 모습으로 비춰졌고 그 많은 스캔들에 비해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다. 인판타 아우랄리아는 교육을 잘 받았을뿐만 아니라 당대 급진적이라고 생각했던 사상도 지지했었는데 이를테면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가톨릭 왕가 왕녀였음에도 "이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알리와 비가 처음 만났을때 알리는 베아트리스에게 바로 청혼했다고 알려져있다. 물론 베아트리스는 그를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마리야는 알리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잘생겼고 교육을 잘받았으며 교양있다고 이야기했다. 마리야는 단지 알리의 아버지가 돈을 물쓰듯이 낭비하는 것과 스캔들 메이커로 전 유럽에 알려진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걱정 스럽긴했다. 특히 마리야는 알리의 아버지의 낭비때문에 알리의 재산이 별로 없을 것을 걱정했다. 아무래도 어머니로써 딸이 힘들게 사는것을 원치 않는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것은 어느 어머니나 걱정할만한 문제였다.
인판테 알폰소
갈리에라 공작
하지만 베아트리스의 혼담에서 실제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종교 문제였다. 에스파냐는 전통적 가톨릭 국가였는데 베아트리스는 비록 지금은 독일에서 살았지만 영국 공주로 개신교를 믿었다. 알리는 베아트리스의 의견을 존중해서 개종을 하지 않는 것을 받아들였다. 결혼했을때 둘의 아이들만 가톨릭으로 키우기로 한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에스파냐 왕실의 반발을 가져왔다. 알폰소 13세의 왕비였던 에나는 영국에서 자랐지만 결국 에스파냐 국왕과 결혼하면서 개종했었다. 에스파냐에서는 에스파냐의 인판타는 가톨릭 교도와 결혼해야한다고 고집했다. 이것은 베아트리스와 알폰소의 결혼이 자꾸 미뤄지는 계기가 되었다.
베아트리스
1909년이 되어서도 결혼이야기는 진전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인판타 아우랄리아가 마리야를 방문기도 했었고 알리가 전쟁터로 보내지기도 했다. 마리야는 인판타 아우랄리아에 대해서 나쁜 인상을 받았으며 이에 대해서 딸에게 "이게 본모습이구나"라는 편지를 보낼정도였다. 알리는 군인으로 복무중이었는데 에스파냐와 전쟁중인 모로코로 보내지게 된다. 이렇게 되자 마리야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으며 에스파냐 왕실 가족들에게 편지나 전보를 보내서 마구 항의했다. 마리야는 에스파냐에서 알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딸과 알리를 결혼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마구 비난했다.
1909년 7월 마리야의 바램대로 결국 알리와 비는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알폰소 13세의 허락을 받지 않는 결혼이었으며 결국 알리는 왕실에서 추방당했으며 부부는 에스파냐로 입국하는 것을 금지 당하게 된다. 결국 베아트리스는 남편과 함께 당분간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했다.
알리와 비
이 문제에 대해서 인판타 아우랄리아의 친구였던 미헨 대공비는 자신의 시누이인 마리야를 비난했다. 마리야가 알리가 비와 결혼하는 것을 밀어붙였고 젊은 알리가 이를 거절할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미헨 대공비의 이런 비난은 어쩌면 자신의 아들인 키릴과 더키가 역시 허락없이 결혼한것에 대한 불만이 더해진것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