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7) 아이들의 탄생과 부모의 죽음

엘아라 2018. 1. 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책이 ㅠ.ㅠ 마리야에 대해서는 많이 없군요.

다른 자료들을 좀 뒤져야하는데 음냐 자료를 어디서 찾아야할지 고민이군요..흠흠흠..


에잇 올해도 그냥 막나가는겁니다. -0-;;;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7) 아이들의 탄생과 부모의 죽음


마리야의 결혼 생활은 초기부터 삐걱대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야와 앨프러드 사이에서는 아이들이 연이어서 태어났다. 결혼한 1874년 10월 아마도 허니문 베이비였을 첫아이이자 아들인 앨프러드(영애피)가 태어났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첫딸이자 둘째아이인 마리(미시)가 그 다음해에는 둘째딸인 빅토리아 멜리타(더키)가 태어났다. 사실 많은 왕족들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와중에서도 아이들을 많이 낳았다. 이것은 아이들을 낳아서 후계자를 얻는 것이 이들의 의무중 하나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878년에는 셋째딸인 알렉산드라(산드라)가 태어났고 1879년에는 아들을 사산했다. 그리고 1884년에는 막내인 베아트리스(베이비비)가 태어났다. 



에든버러 공작 부부와 두 아이인 애피와 미시


첫째아이인 앨프러드는 아버지의 이름과 애칭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이때문에가족들은 "영애피"라고 불렀다. 그는 마리야와 앨프러드의 유일한 아들로, 앨프러드가 백부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을 물려받기로 되어있었기에 그 역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령의 후계자로 키워지게 된다. 

둘째아이인 마리는 외할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의 이름을 따서 마리라고 지었다. 사실 마리의 이름에서 빅토리아 여왕은 섭섭함을 느꼈을 것이다. 여왕은 자신의 후손들이 자신의 이름을 쓰는데 묘하게 관심이 많았는데 둘째아들의 첫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외할머니 이름을 쓴것에 살짝 맘상해했을 것이다. 이것은 여왕의 첫째아들인 웨일즈 공의 장녀인 루이즈도 외할머니 이름을 썼기에 살짝 맘상했는데 큰딸의 첫딸인 샤를로테 마저도 자신의 이름을 안써서 맘상해했다고 알려져있다. (그래서 헤센의 빅토리아를 더 예뻐했다는 소리가...--;;;) 마리는 어린시절부터 예쁜 아이였었다.

둘째딸인 빅토리아 멜리타는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과 앨프러드와 마리야가 좋아했던 거주지였던 "몰타 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다. 사실 그냥은 "빅토리아"라고 불렸을 것이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들중에는 빅토리아들이 하나씩 있었기에 아마도 구별하기 위해서 이렇게 두개의 이름을 썼을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더키라는 애칭으로 더 잘알려져있었다.

셋째딸인 알렉산드라는 마리야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2세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산드라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자매들중 가장 어머니를 많이 닮았던 알렉산드라는 후에 어머니와 가장 가까이 살던 딸이 된다.

막내였던 베아트리스는 고모인 베아트리스 공주의 이름을 땄고 가족들에게는 "베이비 비"로 불렸다. 아마도 나이차가 많이 나는 막내였기에 이런 애칭으로 불렸을 것이다.



다섯아이들과 함께 있는 마리야 


마리야의 막내딸인 베아트리스는 위의 언니 오빠들과 나이차가 좀 있었다. 아마도 이런 나이차가 생긴것은 마리야의 러시아 가족들의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1880년과 1881년에 마리야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야의 부모의 죽음은 러시아 황실 가족들의 불화는 물론 러시아의 불안정한 국내 상황을 외부에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리야가 시집갈 무렵, 마리야의 부모의 결혼 생활은 사실상 파탄났었다. 황제는 황후에게 늘 충실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잠시잠깐의 바람정도였었다. 하지만 이때쯤 황제는 친구의 딸이었던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 공녀에게 빠져들었으며 그녀를 정부로 삼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낳았다. 황제는 예카테리나에게 "언젠가 자유의 몸이 된다면 너와 꼭 결혼하겠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황제가 이렇게 사랑에 빠져서 황후와 황후의 아이들과 거리를 두고 있을 무렵, 원래 건강이 나빴던 황후의 건강은 더욱더 나빠지게 되었다. 1880년쯤에는 황후는 거의 움직일수 없었으며 자주 혼수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1857년

빈터할터 작품



황후가 이렇게 아픈 동안 황제는 어린 정부에게 미친듯이 빠져들었으며 그녀의 아이들을 너무나 아꼈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황제와 황실 가족에 대한 테러가 더 활발해지면서 황제는 사랑하는 정부와 그녀의 아이들을 너무나 걱정하게 되었다. 결국 황제는 정부와 아이들을 자신과 황후가 거주하는 겨울 궁전으로 데려왔으며 심지어 죽어가는 황후의 방 위에 아이들과 정부의 방을 줬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황실 가족들 모두에게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두번째 가족의 안위가 더 소중했던 황제는 체면이나 예절따위는 안중에 없었으며, 러시아에서 황제의 말은 절대적이었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황제의 행동에 아무런 이야기를 할수는 없었다. 죽어가는 황후는 황제의 정부와 아이들을 만났고 그들을 축복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황제에게 여섯 아들을 낳아서 황위계승자의 걱정을 전혀 없게 했으며 평생 황제에게 순종적이었던 죽어가는 황후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


마리야는 외국에서 살고 있었으며 이런 상황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런 경악스러운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마리야는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했었기에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수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리야의 어린 남동생들이나 오빠들은 이런 상황에 아무소리 못했지만 마리야는 달랐다. 그녀는 시집가기 전까지 러시아 궁정에서 제일 사랑받던 사람이었고 황제 역시 여전히 딸을 아꼈었다.(비록 에카테리나와의 사이에서 다른 딸을 얻었지만 말이다.) 마리야는 결국 아버지와 심하게 다퉜고 결국 황제는 정부와 아이들을 다른 궁전으로 보내면서 일을 마무리했다.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두 아이들과 함께 있는 알렉산드르 2세



마리야의 어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는 1880년 6월 사망했다. 마리야는 어머니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꼈지만 곧이은 아버지의 행동에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알렉산드르 2세는 아내가 죽은 한달후에 "자유의 몸이 된다면 결혼하겠다"라고 말했던 에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정식으로 결혼을 했다. 황실에서는 황제가 정부와 결혼할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중에 결혼한 것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물론 황제는 자신이 점차 늙어갔으며 늘 테러의 위협에 시달렸기에 하루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떳떳히 있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황제의 행동은 황실 가족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고 황제로써 아버지로써 모두 황실 가족과 궁정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것이었다. 마리야 역시 이런 아버지를 용납하기 힘들었는데 아버지가 결혼한 직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동생들과 어머니에 대한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잊으셨지만요"라고 쓰기도 했었다.


황제는 예카테리나와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양보는 해서 그녀를 "황후"로 만들지는 않았다. 아마 그랬다면 황실 내부에서 큰 반발이 있었을 것이었다. 자신의 새 아내에게 "유리예프스카야 공비"칭호를 부여했고 아이들은 모두 유리예프스키 공/유리예프스카야 공녀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황제는 새아내에게 황후에게 주는 모든것들을 줬으며 황실 가족들은 이에 더 불안해했었다. 



유리예프스카야 공비

그녀는 러시아 황실에서 미움을 받았는데 특히 황제의 며느리들이나 다른 대공비들이 그녀를 싫어했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황후에게 황제가 매정하게 대한 것은 다 그녀 때문이라고 생각했었고 또 정치적 문제도 있었죠. 황제의 며느리였던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유리예프스카야 공비를 싫어했지만 시아버지가 죽고 나서 유리에프스카야 공비가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너무나 슬퍼하는 모습에 동정심을 가졌고 "모든것을 잊고 모든것을 용서할수 있다"라고 쓸 정도였다고 합니다.



마리야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불만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아마도 그 불만은 어머니가 죽은지 1년도 안되어서 없어졌을 것이다. 왜냐면 그녀의 아버지 역시 사망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끔찍한 폭탄테러로 사망했다. 마리야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 3월 폭탄테러로 상트페텔,부르크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가족들은 물론 사람들 모두에게 충격이었는데 그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즉사하지 않았고 겨울 궁전으로 옮겨져서 사망했다. 황제의 며느리였던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그 끔찍함에 대해 어머니에게 쓰면서 잊혀지지 않는다고 썼다. 마리야 역시 아버지의 이런 끔찍한 죽음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마리야의 시어머니였던 빅토리아 여왕은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사건이 너무나 충격적이며 마리야가 너무나 안됐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마리야는 서둘러 러시아로 돌아갔고 아마도 그전까지는 미워했었던 아버지에 대해서 너무나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그리고 한동안 러시아에서 머물렀으며 마리야의 남편인 앨프러드 역시 아내 곁에 있었다.


부모의 죽음은 아마도 마리야에게 러시아가 이제는 편안한 자신의 집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영국에서 힘든 삶을 살면서 러시아를 그리워했지만 러시아가 아주 편안한 곳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제 자신만의 가족과 집을 만들려했고 그곳은 영국도 러시아도 아닌 곳이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