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라진스키 책도 좀 참고 할려고 했는데 더 읽기가 귀찮습니다. -0-;;;;게다가 라진스키 책은 마리야 아버지 이야기라 마리야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구요.
그래서 대충 그냥 있는 책을 주로 참조하고 예전에 읽었던 글 기억나는 것만 몇개 참조하고 쓰는데 사실 위키가 정리가 더 잘되어있네요 -0-;;;이런이런....
다 올리고 참고 문헌 목록도 올릴께요 ^^* 그래봤자 세개 정도 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5) 결혼
마리야와 알프레드의 혼담은 사실 그다지 오래도록 진전이 없어보였다.가장 큰 이유는 부모의 반대였었다. 게다가 알프레드는 해군으로 여러곳을 돌아다녔기에 구혼에만 집중할수 없었으며, 마리야 역시 러시아에서의 행복한 삶을 포기할만큼 결혼이 급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모든것은 마리야의 부모의 결혼생활이 깨지면서 변화하게 된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1870년
마리야의 어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는 어려서 러시아로 시집왔고 아이들을 많이 낳았기에 건강이 나빴다고 알려져있었다. 그래서 궁정을 비우고 자주 요양을 다녔었으며 궁정을 자주 비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리야 황후는 장남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사망한뒤 그 충격으로 헤어나오지 못했고 결국 궁정에서의 모든 일은 그만두고 종교에 헌신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황제와의 결혼생활도 파탄나는 계기가 되는데 황제 역시 장남을 잃은 슬픔이 컸지만 종교에만 빠져있는 아내를 이해할수 없었으며 결국 다른 여성의 품안에서 그 슬픔을 달래게 된다. 황제는 딸같은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를 정부로 들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들도 낳았다. 이것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 서로에게 거리를 두는 계기가 된다. 아마도 자녀들은 그전까지 부모가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었기에 더욱더 어색함을 느꼈을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 황실에서 남성들이 정부들을 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황제의 아들들의 경우 아버지의 행동을 어느정도는 이해할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딸인 마리야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머니 황후와 함께 있는 마리야
결국 부모의 결혼 생활 파탄은 마리야가 러시아에서 더이상 행복한 삶을 지속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멀고먼 나라의 왕자님인 알프레드에게 더욱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게다가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라는 도덕적인 가치를 우선으로 하던 시기였다. 이것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으로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부부 생활을 이상화 한 것이었다. 적어도 앨버트 공은 결혼생활동안 다른 여성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매우 다정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마리야 역시 이런 분위기를 알았기에 더욱더 알프레드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황후는 딸이 현실 도피로 알프레드에 집착할 것을 우려했으며 다른 신랑감을 찾으려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결국 혼담은 점차 더 구체화 되었는데 특히 황태자 부부가 런던을 방문했을때 알프레드는 황태자 부부를 만나 도움을 청했고 이들 부부는 결혼에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알렉산드르2세 와 자녀들과 며느리인 마리야 표도로브나와 손자인 니콜라이(니콜라이 2세)
서있는 사람들이 다 자녀들입니다. 왼쪽에서 파벨,세르게이,마리야,알렉세이,알렉산드르(알렉산드르 3세),블라디미르 입니다.
이때쯤 이미 마리야의 부모의 결혼은 이미 끝난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결국 1873년 알프레드와 마리야는 결혼을 허락받았고 둘은 공식 약혼하게 된다. 물론 우려 역시 없지 않았다. 알프레드의 누나로 미리 마리야를 만났었던 앨리스 공주는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에게 신붓감이 매우 괜찮다고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여왕은 이미 마리야 여대공이 오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었고, 여왕은 이런 마리야가 며느리가 되는 것을 매우 걱정했다고 한다. 앨프러드는 둘째아들이었으며 러시아 황제의 딸로 궁정에서 중심이었던 마리야가 영국에서는 동서인 알렉산드라보다 아랫사람이 되어야했고 이것은 모두가 걱정하는 일이었다. 여왕은 물론 여왕의 친구인 네덜란드의 소피아 왕비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걱정했는데 왕비는 약혼하기 전 이미 이런 사항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었을 정도였다. (소피아 왕비는 빌렘 3세의 왕비로 뷔르템베르크의 공주였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파벨 1세의 딸이었던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이었기에 소피아 왕비는 알렉산드르 2세와 사촌관계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아직 만나지 않았던 며느리 감에 대해서 나쁜 말을 더 많이 들었으며 만만치 않은 시어머니임을 미리부터 보여준다. 이를테면 빅토리아 여왕은 약혼이 진행된 뒤 딸인 앨리스가 러시아 황실 가족들을 미리 만나러 간것에 대해서 매우 화를 내면서 "넌 이미 러시아쪽 편을 드는구나"라고 화를 냈을 정도였다..
마리야와 앨프러드
약혼 사진
결혼협상이 진행되면서 여러가지 구체적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일단 결혼식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치루기로 했으며 빅토리아 여왕은 여기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마리야와 앨프러드의 결혼 협정은 29개의 조항으로 이뤄졌는데 이중에는 마리야가 자신의 종교인 정교회를 믿는것에 대한 것도 포함되었으며, 또 황제가 딸에게 주는 연금에 대한 이야기도 언급되어있었다. 마리야는 10만 파운드의 혼수를 가지고 갔지만(대충 현재 시세는 100배정도로 생각하면 될겁니다.) 그 외에서 황제가 따로 연금을 지급한 것이었다.
결혼이 결정되고 결혼 준비가 진행되면서 마리야의 부모는 딸이 멀리 떠나가는 것에 대해서 매우 아쉬워했다.영국에서 결혼을 위해 건너간 목사의 아내는 황제 부부가 딸을 걱정하는 모습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었습니다.
1874년 1월 23일(구력 11일) 21살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은 29살의 영국의 에든버러 공작 앨프러드 왕자와 겨울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둘의 종교인 성공회식과 정교회식으로 치뤄졌다. 마리야는 러시아 황실의 전통 혼례복을 입고 부모가 준 보석으로 치장하고 결혼식을 치뤘다. 결혼식내내 마리야의 부모는 딸이 멀리 떠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그대로 드러냈었다.
앨프러드와 마리야의 결혼식
러시아에서의 결혼식이 끝난후 이제 에든버러 공작부인이 된 마리야는 영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는 가족들에 대해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녀의 시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있었다. 1874년 3월 이들은 영국에 도착했으며, 여왕은 며느리를 만나기 위해 기차역으로 마중을 갔었기에 마리야는 기차역에서 시어머니를 처음 만나게 된다. 여왕이 이전에 어떤 말을 듣고 어떤 행동을 햇었던 간에 처음 만난 며느리에 대해서 매우 다정하게 대해줬었다. 또 영국 사람들 역시 러시아 황제의 딸이 영국 여왕의 며느리가 된것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대했으며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일들을 진행했다. 이를테면 마리의 이름을 딴 비스킷이 나오기도 했었다. 이런 대중적 관심은 마리야가 여왕을 만나 버킹엄 궁전으로 가는 동안 수많은 인파가 여왕의 새 며느리를 보기 위해 나오게 했었고 아마 이들은 여왕과 이제 여왕의 며느리가 된 황제의 딸을 열성적으로 환영했을 것이다.
여왕과 만나는 마리야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