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4) 혼담

엘아라 2018. 1. 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결혼할때쯤에 부모의 결혼 생활도 파탄나거든요.

뭐 사실 결혼생활이 파탄나는 것은 일단 쌍방과실일 가능성이 큰데 이 부부도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오래도록 아내에게 나름 충실했지만, 그의 아내는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너무 많이 낳아서 건강이 나빠서 자주 궁정을 비웠고 아내가 없는동안 황제는 가벼운 연애질을 하면서 살았다고 해요. 이건 니콜라이 1세도 마찬가지였던....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아들인 닉사(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가 죽으면서 황후는 아들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종교에 귀의해버립니다. 문제는 종교적..이라는 단어가 뭐랄까 부부의 육체적 관계를 더이상 거절한다는 의미도 포함되는 뉘앙스더라구요. 결국 황제는 정부를 찾게 되는데 그 정부가 바로 황제가 미친듯이 사랑에 빠졌다던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어디서는 돌고루코바로 쓰고 어디서는 돌고루카야로 써서 저도 어느게 맞는지 모르겠는데 돌고루코바가 맞는거 아닌가 싶습니다.=-=;;) 였다죠. 황제는 자기보다 30살이나 어린 예카테리나를 정부로 들이면서 진정한 사랑은 그녀 뿐이며 자신이 자유로워지면 반드시 결혼할거라고 했다더라구요....-0-;;; 


[새해특집]황제의 딸, 여제의 며느리 그리고 "코부르크 부인" :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4) 혼담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당대 강력한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절대 통치를 펼치던 황제의 고명딸이었다. 당시 러시아 황족들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로 알려져있었으며 마리야 역시 결혼하면 엄청난 재산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게다가 마리야의 아버지인 황제는 딸을 끔찍하게 아꼈고 이런 딸을 위해서 황제가 못해줄것은 없었을 것이었기에 더욱더 사람들이 여대공의 혼수가 엄청날것이라고 예상했다.



소녀시잘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아마 그렇기에 마리야는 자라면서 유럽에서 관심갖는 신붓감중에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라야의 부모는 사랑하는 딸을 멀리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마리야의 세 고모들중 첫번째 고모는 러시아에서 남편과함께 살았다. 두번째 고모는 뷔르템베르크의 왕비가 되었기에 러시아를 떠나야했었다. 막내 고모 역시 러시아에서 살았지만 아이를 낳다가 일찍 사망했었다. 러시아의 여대공으로 어디 왕비가 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러시아 궁정에 남는 편이 훨씬더 나았고 특히 마리야의 경우는 부모가 딸을 너무나 예뻐했기에 멀리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했을 것이다.


이런 마리야에게는 의외로 많은 혼담은 들어오지 않는데 가장 큰 이유는 마리야가 15살때 만난 한 남자와 지속적인 혼담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아들인 앨프러드였다. 어머니에 의해서 "에든버러 공작"이 되었으며 자식이 없던 백부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의 뒤를 잇기로 되어있었던 앨프러드는 해군이 되어서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다녔다. 자식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했던 빅토리아 여왕에게 앨프러드는 가장 멀리있는 아들이었다. 다른 아들들은 적어도 여왕의 눈아래 있을수 있었지만 앨프러드는 해군이 되었고 바다 멀리 나가있었기에 여왕은 아들을 자주 만날수조차 없었고 이런 상황은 빅토리아 여왕이 아들에게 좀 더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앨프러드 왕자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아들


마리야와 앨프러드가 만난것은 헤센 대공가문의 수도였던 다름슈타트에서였다. 헤센 대공가문은 마리야의 외가였으며 미라야의 어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친정을 자주 방문했었다. 특히 마리야 황후는 오빠인 알렉산더와 매우 친했으며, 알렉산더와 그의 귀천상혼한 아내인 바텐베르크 공비와 그 자녀들은 러시아 황제 가족들 특히 마리야와 밑의 아이들인 세르게이와 파벨을 상대적으로 자주 만났었다. 한편 앨프러드의 누나였던 앨리스는 헤센 대공가문의 후계자였던 루드비히와 결혼했다. 루드비히는 후계자가 없었던 백부 루드비히 3세의 후계자였는데, 앨리스의 남편인 루드비히는 황후의 조카이자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사촌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당대의 많은 유럽 왕족들처럼 그냥 친척들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야가 자라고 앨프러드의 혼담이 흐지부지 되면서 둘을 엮어주려는 친척들이 생겨났었다. 그 친척들은 바로 마리야의 올케언니이자 덴마크의 공주였던 마리야 표도로브나와 앨프러드의 형수로 역시 덴마크 공주였던 알렉산드라였다. 두 자매는 매우 친했으며, 자매들은 서로의 가족들이 친해지길 바랬다. 그리고 마리야의 시누이와 알렉산드라의 시동생이 결혼한다면 두 가문의 유대는 훨씬더 공고해질것이라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마리야 표도로브나와 알렉산드라



1871년 17살의 마리야는 부모와 함께 외가인 헤센 대공가문을 방문했고 앨프러드는 형과 형수와 함께 역시 누나인 앨리스가 살고 있던 헤센 대공 가문을 방문했다. 둘은 마리야의 외삼촌이자 앨리스의 시숙부였던 헤센의 알렉산더의 집인 하일리겐베르크 성에서 다시 한번 만나게 되었다. 이런 만남은 사실상 선 자리나 다름없었으며 이 만남동안 앨프러드와 마리야는 서로에게 빠져들게 된다. 둘은 하일리겐베르크에서 머무는 동안 함께 산책을 했고 대화를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둘은 음악을 사랑하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이런 공통 주제는 서로를 더 잘 알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둘은 점차 서로에게 끌렸고 결혼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지만 둘의 결혼에 대한 공식 발표는 없었다. 둘의 혼담에 대해서 양측 부모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앨프러드가 마리야와 결혼하려했던 이유를 러시아 황제가 가장 예뻐하는 딸이자 엄청난 혼수를 가진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앨프러드 역시 부유한 영국 왕실 가족의 일원이었으며 물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것이긴 했지만 돈때문에 마리야와 결혼하려했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혼기가 찼으며 결혼해야하는 의무도 알았기에 아마 적당한 신붓감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리야는 그에게 적합한 신붓감이기도 했다. 영국 왕족들은 "가톨릭교도"와는 결혼할수 없었지만 정교회를 믿는 사람은 상관이없었다. 실제로 이전에 앨프러드의 신붓감으로 거론된 인물은 마리야의 사촌으로 그리스 국왕과 결혼한 올가 콘스탄티노브나였었다. 앨프러드의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자녀들이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을 원치 않았고 적어도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와의 결혼은 스캔들이 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지적이었으며 정치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알려지게 되는 마리야는 아마도 세상 여러곳을 여행했던 해군이었던 앨프러드에게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그녀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녀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앨프러드는 멀고 먼 나라의 왕자님이었으며 세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인물이었기에 마리야가 몰랐던 많은 세상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고 이런 그에게 마리야는 매료되었을 것이다. 



러시아 궁정 예복을 입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하지만 둘의 부모인 빅토리아 여왕과 알렉산드르 2세 부부는 생각이 달랐다. 여왕은 러시아 황제가 자신의 아들을 뺏아갈것을 우려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으며 여러 여대공의 선례처럼 앨프러드가 러시아에서 살아야할 수가 있었다. 실제로 여왕은 외손녀인 엘라와 알렉산드라가 러시아로 시집가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너무 멀리 살아서 자주 볼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러시아 상황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말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이 죽은 뒤 아이들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던 여왕에게 이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을 것이다. 비록 앨프러드가 늘 바다에 나가있던 아들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여왕은 러시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여왕의 이모였던 안나 파블로브나가 러시아의 콘스탄틴 대공과 원만하게 살지 못하고 결국 이혼했던 것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또 기본적으로 영국 왕실 가족들은 러시아 황실 가족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기도 했다. (이를테면 빅토리아 여왕의 세례식날 여왕의 세례명은 알렉산드린 빅토리아였는데, 여왕의 백부였던 조지 4세는 조카의 세례명에 자신의 이름이 러시아 황제 뒤에 들어가는 것이 싫다고 쓰지 말라고 테클걸었었다.)



앨프러드의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

남편이 죽은 뒤

1860년대 인듯


러시아쪽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황제와 황후에게 영국은 너무나도 먼 나라였다. 딸이 영국으로 시집가면 거의 딸을 거의 못만나게 될 가능성이 컸기에 딸을 러시아에서 살게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그걸 허락할리 없었다. 또 황후는 러시아 궁정과 전혀 다른 분위기인 영국 궁정의 분위기에도 걱정했다. 영국 사교계는 러시아에 비해서 매우 차갑다고 알려져있었으며 이런 상황에 딸이 적응 하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뿐만 아니라 크림 전쟁이후 영국에서 반 러시아 감정이 고조되었기에 러시아황실 가족의 일원인 딸이 영국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이때문에 황제 부부역시 딸과 앨프러드의 결혼에 호의적이지 않게 되었다. 



마리야의 부모

알렉산드르 2세 부부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