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그리스

앨리스 :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8)

엘아라 2017. 10. 9. 06:00

앨리스 :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8)

 

'릴리벳(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애칭)이 그러더냐?'

-하노버의 게오르그 공비(막내딸 소피아)가 앨리스에게 여왕이 버킹엄 궁정에 살자고 초청했다는 말에 앨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했다는 말

 

앨리스는 아들이 누구와 결혼하던지 크게 상관하지 않았을듯하다. 물론 복잡한 그리스 왕위문제가 있긴 했고, 그리스 왕위계승자는 왕족과 결혼해야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들이 그리스의 국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크게 하지 않았을것이다. 하지만 앨리스의 가족들은 달랐다. 앨리스의 가족들은 잘생긴 앨리스의 아들에게 멋진 앞날을 만들어주려고 하고 있었다. 바로 영국 여왕의 남편 자리였다. 둘을 엮어주기 위해서 앨리스의 가족들 대부분이 힘쓰기 시작했다. 그 중심인물은 딕키라는 애칭의 앨리스의 남동생인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이었다. 그는 필리포스 왕자의 장래를 고민했으며, 잘생긴 조카를 여왕의 남편감으로 찍었다. 이 계획에는 앨리스의 어머니 뿐만 아니라 그리스 왕가 사람 대부분이 참여했다. 여기에는 엘리자베스 공주의 숙모이자 필리포스의 사촌이었던 켄트공작부인 마리나도 포함되었다.

필리포스와 엘리자베스는 처음에는 서로에 대해 미적대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외손자와 제일 친한 자신의 친손자를 찔러서 공주에 대한 감정을 부추겼으며, 마리나나 딕키는 필리포스와 엘리자베스 공주가 만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으로 잘생긴 해군 장교와 장래의 여왕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둘이 사랑에 빠졌지만 결혼을 위해서는 아직까지 험난한 일이 남았다. 공주의 어머니인 왕비는 사윗감을 반대했고, 외국 왕족이라는 필리포스의 신분도 문제가 되었다. 소소하게는 필리포스의 누나들이 모두 적국이었던 독일 왕족과 결혼한것이나 필리포스 왕자가 모계로건 부계로건 엘리자베스 공주와 친척관계라는것도 문제가 되었다.

 



여왕님과 필립공의 약혼사진

 

먼저 필리포스의 국적문제부터 해결했다. 그리스 왕가는 그가 그리스 왕위계승권을 포기하고 영국 시민이 되는것을 허락했다. 그리스의 필리포스 왕자는 이제 영국의 해군 중위 필립 마운트배튼이 되었다. 왕비의 반대는 공주의 굳은 결심으로 바뀌었고, 나머지 문제는 일단 무조건 감추는것으로 대충 얼버무려졌다. 이때문에 필립의 누나들은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했고 매우 섭섭하게 생각했으며 한동안 동생에 대해서 삐져있었다.

 



여왕님 결혼 60주년 기념우표중

저기 오른쪽이 결혼식사진입니다.

 

아들이 영국의 왕위계승자와 결혼했지만, 앨리스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리스에 머무르면서 자선사업을 했다. 비록 수녀회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어쨌든 앨리스는 수녀복을 입고 살았으며, 많은 이들이 앨리스를 수녀로 알게 되었다.(아들인 필립공은 어머니가 수녀복을 입는것에 대해서 이것은 어머니가 머리나 옷에 대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것을 의미한다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삶은 점차 힘들어져갔고 앨리스는 고립되어갔다.

그리스 왕실의 늙은 사람들은 점차 사라져갔다. 앨리스는 조카인 그리스 국왕인 파울로스 국왕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그의 부인이자 정치적 영향력때문에 다른이들의 미움을 받던 프레데리카 왕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이든 왕실 인물들이 점점 죽어가면서 젊은 이들과는 맞지 않았기에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외로움을 앨리스는 여행을 하면서 달랬다. 전 유럽에 있는 자신의 아이들과 그 후손들을 보러 다녔고, 여름에는 정기적으로 동생인 루이즈를 보기 위해 스웨덴으로 갔다. 루이즈와 루이즈의 남편인 구스타프6세 아돌프는 앨리스와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인도나 바레인등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들 부부와 새로태어나는 손자손녀들을 보기 위해 영국에도 자주 갔다. 영국에 있는 동안 앨리스는 절대 언론앞에 나서지 않았다.

 



아들 필립공과 함께 걷고 있는 앨리스

수녀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그리스의 정치 상황은 여전히 나빠졌다. 1963년 파울로스 국왕이 사망한후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가 즉위했다. 콘스탄티노스가 즉위했을때 모두들 그의 치세에 가장 큰 문제점은 그의 젊음으로 인한 정치적 미숙함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인 프레데리카 왕비라고 여겼다.왕비의 과도한 정치 개입은 왕실의 입지를 약화시켰으며 그리스에서 공화주의자들이 점점 힘을 얻게 된다. 1967년 81살이 된 늙은 왕자비가 살기에는 그리스는 매우 불안정한 곳이 되었다. 그해 4월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치인들은 체포되고 국왕은 감금됐지만 사실상 국왕은 쿠데타를 지지했다. 아테네에서 총격전이 발생했으며, 국민들이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기에 혼란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리스 왕실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예외였다.

필립공은 이전에 어머니에게 같이 살자고 이야기했지만 자신의 삶이 있다면서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쿠데타 발생이후, 상황은 안 좋아졌다. 여왕과 필립 공은 그리스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겼으며,앨리스를  어떻게든 영국으로 오게 하려했다. 앨리스의 막내딸인 소피아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서 여왕의 의지를 전했고, 앨리스는 결국 수락했다. 앨리스는 63년전 아름다운 신부로 첫발을 디뎓던 조국을 영원히 떠나 자신이 태어난 나라로 조용히 돌아갔다.



죽기 1년전에 찍은 마지막 공식 사진

 

영국으로 돌아온후 앨리스는 아들가족과 함께 살았지만, 자신만의 스케줄로 생활했다. 왕실가족들은 앨리스가 왕실 여름휴가를 함께 하지 않겠다는것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앨리스와 함께 살아가는것에 익숙해졌다. 앨리스는 너무 늙었고 점점 약해져갔다. 이 때문에 궁정에서 앨리스는 매우 조용한 삶을 살았다.

 

1969년 12월 5일 앨리스는 자던중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앨리스의 손녀인 프린세스 로열 앤은 매일 할머니를 방문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신날은 할머니를 뵙지 못했기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뵙게 해달라고 했다. 앤 공주는 침대에 누운 할머니의 모습에 대해 '무척이나 아름다우셨다. 얼굴의 주름이 모두 사라져 마치 드 라즐로의 초상화처럼 보이셨다.'라고 했다.

 



필립 드 라즐로가 그린 앨리스

1920년대

 

앨리스는 죽기전 이모 엘라 대공비가 묻힌 이스라엘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왕실 가족들이 멀어서 가기 불편하다고 반대했다. 이에 앨리스는 "거기 버스편이 얼마나 편리한데"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앨리스는 자신이 태어났던 윈저성에 묻혔다. 하지만 30여년이 지난후, 앨리스의 유언은 행정적,외교적,종교적 문제를 다 겪은후 이루어진다.

현재 앨리스는 평생 존경했던 이모이자 대모였던 엘라 대공비가 묻혀있는 성 마리아 마그달레나 성당의 한 납골당에 묻혀있다.

 

앨리스의 전기 저자인 휴고 비커스는 앨리스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어려운 시기를 보내지 않았다면, 앨리스는 그녀가 이뤘던것보다 더 많은것을 할수 있었을것이다. 그녀가 의지가 좀 덜 굳고, 덜 고집스러웠다면, 그녀의 인생은 아마도 평온했을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낙담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이 모든일에서,앨리스는 자신보다 불운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앨리스는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 좌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좌절에서 다시 일어서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다. 늘 성공하는것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한 그녀의 삶은 존경받을만 한 삶이었다.



아름다운 앨리스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