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그리스

앨리스 :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6)

엘아라 2017. 10. 5. 06:00

앨리스 :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6)


'너도 앨리스가 남편과 아이들과 떨어져서 수년간 요양원에서 살았다는것을 기억하겠지.'

-메리 왕비가 동생 애쓰론 백작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왕자비는 바덴의 마르크그라프(앨리스의 둘째사위,바덴의 베르톨트)와 그 부인(앨리스의 둘째딸, 테오도라)의 방문을 기다리면서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는동안 간호사에게 짐을 꾸려두라고 했다. 왕자비의 딸과 사위가 떠나려하자 왕자비는 코트를 입고 모자를 썼다. 그리고 딸과 사위에게 자신도 데려가달라고 매달렸다. ..... 사위가 의사의 동의 없이 그녀를 데려갈수 없다고 말하자 결국 체념했다....'

-크로이츨링겐의 요양원에서  앨리스의 딸 부부가 앨리스를 방문한 어느날에 대해서 앨리스의 간호사가 쓴 기록

 

앨리스와 가족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스에 있던 살림 거의 대부분을 두고 거의 맨몸으로 빠져나와야했기에 엄청난 경제적 문제에 직면했다. 사실 경제적 문제는 앨리스 가족 뿐만 아니라 망명중이던 그리스 왕가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다행히 그리스 왕가에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이 둘 있었다. 바로 상속녀였던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왕자비와 그리스의 아나스타샤 공비가 그들이었다. 게오르기오스 왕자의 부인이었던 마리 보나파르트는 엄청난 재산을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살고 있었으며, 시댁 식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주었다. 그리스의 아나스타샤 공비는 안드레아의 동생인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부인이었다. 미국인인 그녀는 낸시 리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크리스토포로스 왕자보다 나이도 훨씬 많았으며, 이미 두번이나 결혼한적 있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낸시 리즈는 남편인 미국 철강왕 윌리엄 리즈였으며 그는 아내에게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 (1908년 남긴 유산은 이천오백만 달러에서 사천만 달러로 추산된다.- 미국식은 잘 모르는데 영국식 현재 물가 환산은 대충 당시 돈에 100내지 150을 곱해야한다고 합니다. 이걸로 추정해보면, 대충 30억 달러 쯤 될듯합니다. 참고로 말버러 공작과 결혼하면서 현금을 싸들고 갔다고 알려진 콘수엘로 밴더빌트의 지참금이 20만달러였나 그렇습니다.) 8여년간의 약혼후 결혼한뒤 그리스의 아나스타샤 공비라는 칭호를 받았던 낸시 리즈는 자신의 재산을 그리스 왕가를 돕는데 아끼지 않았다.

 

앨리스와 가족들 역시 프랑스에 자리를 잡았다. 안드레아의 다른 형제들은 군대에 관심이 없거나,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문에 망명생활중 그들은 다른 일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안드레아는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고, 어린시절부터 군인으로 훈련받은것 외에는 그다지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할일 없는 망명생활은 안드레아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으며 더욱더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 앨리스 역시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삶에 점점 지쳐가게 되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종교와 영적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앨리스는 혁명으로 인한 친척들의 죽음, 돌아갈 기약없는 망명생활, 점점 멀어져가는 남편, 이루어질수 없었던 잠깐의 사랑등으로 힘들어했었다.

 

안드레아와 앨리스는 은혼식때까지는 그런대로 잘 견디고 있었다. 은혼식을 기념해서 가족들은 사진을 찍었으며 모든 가족이 모였다. 하지만 이것이 앨리스가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이었다.

 



은혼식때 쯤 사진

늘 생각하지만 딸들보다 더 예쁜 앨리스입니다.

딸들은 왼쪽에서 마르가리타,세실,소피,테오도라입니다

 

 

은혼식후 앨리스는 환상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거나 자신에게 치유능력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런 앨리스의 행동은 모든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앨리스는 "왕족"이었으며, 그녀는 지켜야하는 가족의 "사회적 체면"이 있었다. 적어도 길거리에서 이런 황당한 소리를 해서는 안되는 인물이었다. 앨리스의 상태는 점점 심해졌으며, 정신과의사였던 동서 마리 보나파르트는 요양원에서 치료받길 권할정도였다. 프로이트는 앨리스의 상태를 편집증에 가까운 상태로 진단했으며, 앨리스의 가족들은 앨리스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두려워했으며, 앨리스의 어머니 빅토리아는 사위의 묵인하에 딸을 강제로 차에 태워 요양소로 보냈다. 이후 앨리스의 가족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졌다. 앨리스의 딸들은 어머니가 떠난지 1년 안에 서둘러 결혼했다. 네딸들중 제일 어렸던 소피는 겨우 16살이었다. 하지만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공주들에게 정신적으로 아픈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딸들의 혼삿길은 모두 막길것이기 때문이었다. 딸들이 모두 떠나자, 안드레아스 왕자는 아직 부모의손길이 필요했던 아들 필리포스를 장모인 빅토리아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는 파리의 즐거운 사교계 생활에 몸을 맡겼으며 요양원에 있는 앨리스를 찾아가지 않았다.

안드레아스 왕자가 "아픈 부인"과 어린 아들을 버려둔것은 잘못된일이긴하다. 하지만 당시 안드레아가 아픈 부인을 일부러 버린것은 아니었다. 그 스스로도 너무나 힘들었기에 부인까지 챙길 힘이 없었던 것 뿐이었다. 그는 딸들이 결혼할때마다 슬퍼했고, 딸들의 집에 자주 같이 머물렀다. 특히나 사랑했던 딸 세실과는 자주 머물렀으며 휴가땐 언제나 아들 필리포스를 챙겼다.(필립공은 언제나 이런 아버지와의 교류를 소중하게 여겼다고 휴고 비커스가 책에서 주장합니다....아마 필립공이 그렇게 이야기한듯합니다. )

 


안드레아스 왕자

 

앨리스가 보내진 요양소는 닥터 빈츠방거가 운영하는 크로이츨링겐이라는 요양소였다. 이곳은 많은 유명인사들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중 한명이 바로 유명한 무용가인 니진스키였다. 이곳에서 앨리스는 자신은 부당하게 이곳으로 왔으며,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소용없었고, 앨리스는 한동안 가족들을 증오했고 용서하지 않았다. 딸들이 가끔 왔지만, 처음에는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후 가장 가까이 살던 둘째딸이 자주 방문했는데 둘째딸 부부가 올때면 늘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요양원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앨리스의 상태때문에 빅토리아는 딸을 정신과 치료를 위한 요양소가 아닌 다른곳으로 보내길 바랬다. 의사들은 반대했지만, 빅토리아는 이탈리아의 옐레나 왕비의 도움으로 딸을 이탈리아에 있는 심장병 전문 요양소로 보냈다.(옐레나 왕비의 여동생인 몬테네그로의 안나는 앨리스의 숙부였던 바텐베르크의 프란츠 요제프와 결혼했습니다.) 그 이후 앨리스는 좀더 나아졌으며 행동도 훨씬 자유롭게 된다. 하지만 앨리스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을 요양소로 보낸 가족들을 용서할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7년간 앨리스는 유럽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살았다. 앨리스의 상태는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했으며, 가족들과 거의 인연을 끊고 살았다.

 

1937년은 앨리스의 상태가 크게 변한 해였다. 이해부터 앨리스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다. 그리고 다시 가족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앨리스의 가족들은 흩어져버렸다. 안드레아는 니스에서 사교계 생활을 여전히 즐기고 살았으며, 아들 필리포스는 이제 더이상 어머니 손길을 필요로하지 않았다. 딸들은 이미 결혼해서 모두 자신의 가정이 있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이때까지 만나지 않았던 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앨리스의 상태를 변화시킨 사건은 1937년 11월 16일에 일어났다. 헤센 대공가 사람들은 둘째아들인 루드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여기에는 대공비인 엘레오노레와 그의 아들이자 대공가의 후계자인 게오르그 도나투스와 부인인 세실 그리고 그들의 두 아들이 타고 있었다. 앨리스의 딸인 세실은 오촌과 결혼해서 세명의 아이를 두었고, 네번째 아이를 임신중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비행기는 네덜란드에서 추락했고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가족들 모두에게 충격이었으며, 루드비히는 사고 다음날 서둘러 결혼한후 가족의 시신들을 수습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갔다. 루드비히의 신부는 결혼식날 신부의 흰 드레스가 아닌 검은 상복을 입고 결혼했다. 헤센의 대공이었던 에른스트 루드비히는 아들 결혼식 한달전에 이미 사망했었다. 대공이 죽은지 겨우 한달후 대공가의 사람들 대부분이 사망한것이었다. 필립공은 후에 인터뷰에서 누나의 죽음에 대해서 들었던때 충격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앨리스는 딸과 함께 다름슈타트로 갔다. 앨리스의 친척들 대부분이 이곳에 모였다. 앨리스의 여동생인 루이즈도 스웨덴에서 남편과 함께 왔고, 안드레아도 아들을 데리고 왔다. 딸들 역시 다 모였다. 이때문에 앨리스의 큰딸인 마르가리타는 "세실이 죽어서 우리 가족을 모이게 했다"라고 하면서 슬퍼했다고 한다.

 


세실

그리스어로는 케킬리아라고 하더라구요.

 

 

세실의 죽음은 앨리스와 안들레아스 왕자 둘다의 삶에 큰 영향을 줬다. 세실은 안드레아스 왕자가 제일 사랑한 딸이었으며, 그는 이후 가족 대부분과의 관계를 끊고 살았다. 그는 후에 장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간이 갈수록 슬픔이 더 커진다"라고 이야기했다. 앨리스 역시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앨리스의 반응은 안드레아스 왕자와 정 반대였다. 그녀는 가족을 잃는 슬픔에서 더이상 가족과 떨어져 지내서는 안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이것은 앨리스가 자신의 병을 극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닥터 빈츠방거는 앨리스에 대해서 "왕자비의 셋째딸이 죽은 비행기 사고는 왕자비에게 긍정적 충격이 되었다. 이것은 왕자비를 세상 다른 모든것들로 부터 격리시켰던 것과 반대로 남편과 나머지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라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