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7)
'나는 딕키 외삼촌(앨리스의 동생,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에게서 네가 영국 전함에서 일할예정이라는것을 알았단다. ...나와 고국의 다른 사람들은 네가 그리스의 전함에서 복무해야한다고 생각한단다. 게다가 최근에 영국이 그리스를 위해 6척의 배를 지원해주었잖니....'
-2차대전중 영국 해군으로 복무중인 아들 필립에게 보내는 앨리스의 편지
병에서 회복한 앨리스는 다시 가족과 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상황이 변해있었고, 특히 남편 안드레아스 왕자와의 관계가 그랬다. 둘은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했고 결국 서로 우호적으로 별거하는 것에 합의했다. 앨리스가 생각하는 남편과의 관계와 안드레아스 왕자가 생각하는 부인과의 관계가 너무 달랐던 것이다.
니스에서 지내던 남편과 다시 함께 머물지 않게 된 앨리스는 그리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근현대의 그리스는 늘 정치적으로 불안정했지만, 특히나 1930년대는 불안감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기중하나였고 앨리스가 돌아가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하지만 앨리스는 영국에 있는 아들 필리포스가 언젠가는 그리스로 돌아와야한다고 생각했고, 아들이 돌아올때를 대비해서 자신이 그리스에서 터전을 마련해야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앨리스는 이 혼란한 나라에서 자선활동을 시작했다.
앨리스가 그리스로 돌아간 직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리스는 전쟁초기 이탈리아군을 막아냈지만, 곧 독일군의 참전으로 수세에 몰리게 된다. 1941년 그리스 수상은 국왕인 게오르기오스2세에게 항복하라고 권했지만 국왕은 거부했다. 다음날 수상은 좌절감으로 권총자살했다.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은 남북으로 그리스를 양분해서 점령했다. 국왕과 왕실 가족은 늙은 국왕의 숙모 두명을 빼고 모두 망명길에 올랐다. 국왕과 왕태자인 동생은 영국으로 갔고 나머지 가족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갔다. 앨리스와 앨리스의 동서인 엘렌(니콜라오스 왕자비,러시아의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만이 그리스에 남았다.
앨리스는 1차대전때처럼 2차대전때도 가족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것을 보았다. 앨리스의 동생인 딕키는 영국 해군 사령관이었으며, 아들인 필리포스는 영국 해군으로 복무중이었다. 하지만 앨리스의 사위들은 모두 독일인이었으며 독일군에서 싸우고 있었고 특히 막내 사위는 SS친위대 장교였고, 그 형은 나치의 고위 간부이기도 했다. (헤센-카셀가 사람입니다.)
앨리스의 아들 필리포스 왕자
영국의 필립 공
그리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앨리스는 독일군에 매우 분개했다. 앨리스는 스스로가 독일 출신이기도 했고 딸들이 모두 독일인과 결혼했었지만, 독일군에 적개심을 가졌으며, "필요한것이 없냐"라고 묻는 독일 장군에게 "내 나라에서 떠나시오"라고 답할 정도였다.
독일 점령 첫해 겨울인 1941년말-1942년초 그리스에는 매우 혹독한 시련이 닥쳤다. 식량사정이 매우 안 좋았는데, 아테네 인근에서만 하루에 아사자가 1000명이 넘었으며 대부분 어린아이들이었다. 앨리스는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의 구호단체와 함께 어린이 구호소를 열였다. (앨리스의 동생인 루이즈는 스웨덴의 왕태자비였다.) 매우 엄격한 감시하에 먹을것이 주어졌다. 아이들이 다 먹은후 남은 음식이나 음식 찌꺼기가 있다면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주어졌다. 앨리스는 다른 이들보다 나은 생활을 할수 있었지만, 그녀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이 굶주렸으며 이해 겨울 앨리스의 몸무게는 21kg이나 빠졌다. 하지만 앨리스는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은 언제나 건강하며 자신의 주변에는 아무일도 없는 평온한 나날이 지속된다고 이야기했다.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몰려든 그리스 사람들
사실 앨리스의 주변에 아무 일도 없었던것은 아니었다. 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한후 그리스의 유대인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탈리아가 점령했던 아테네로 도망쳤으며,아테네에서 국외로 달아났다. 이를 도운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있었다. 정교회 대주교는 그리스인들에게 유대인들을 숨겨주라고 했으며, 아테네 경찰서장은 수만장의 허위문서를 발급해서 유대인들이 도피할수 있도록 도왔다.
앨리스 역시 이때 한 유대인 가족을 숨겨주었다. 그들은 왕실가족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리스에 남은 몇안되는 왕족중 한명인 앨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한것이었다. 그리고 앨리스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숨겨주었다. 후에 앨리스는 게쉬타포의 심문을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청력장애를 이용해서 무슨소리인지 못알아들은척 했다.
훗날 살아남은 가족중 한명이 앨리스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했을때 앨리스는 당연한 일을 했다고 하면서 감사인사를 받길 거부했다. 그리고 앨리스는 죽을때까지 이 일을 입밖에 내지 않았으며, 이때문에 가족들은 앨리스 생전에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때 일로 앨리스는 "열방의 의인"이라는 이스라엘에서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명예를 수여받게 된다. 이 상은 홀로코스트 기간동안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구해준 외국인들에게 수여되는 상이었다. 앨리스에게 수여된 이 상은 아들인 필립공이 대신 받았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어머니는 이 같은 일을 "당연한것으로 생각해서 도운것"이라고 이야기했다.
1944년 10월 독일점령이 끝난후 그리스는 더욱더 큰 혼란에 빠졌다. 연합군은 그리스 왕가의 복위를 지지했지만, 그리스내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반대했으며 그리스는 내전에 빠졌다. 1944년 12월 2일 ELAS(그리스 사회주의 정당 군대,아마 2차대전때 독일군과 주로 도시 게릴라전을 벌렸던듯합니다. 이쪽을 안 읽어봐서..--;;)와 영국군 간에 아테네시가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앨리스에게는 내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1944년 12월 5일 앨리스는 두통의 전보를 받았다. 하나는 프랑스 주재 그리스 대사로부터 온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카인 게오르기오스 2세로부터 온것이었다. 남편 안드레아스 왕자가 니스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별거상태에 있었던 남편이었지만, 남편의 죽음은 앨리스에게 충격이었다. 앨리스는 남편을 위해 상복을 입고 추모 예배를 하면서 오래도록 떨어져지냈던 남편을 잃었다는것을 받아들였다.
앨리스의 남편
안드레아스 왕자
이 내전동안 앨리스는 친구 한명을 얻게 된다. 영국군 장교였던 제랄드 그린 소령이었다. 내전당시 아테네에서는 하루 23시간에 달하는 통행금지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는 매일 왕자비들을 방문했는데, 이는 왕자비들을 위해 식료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여느때 처럼 그린 소령이 식료품을 가지고 왔을때 앨리스가 집에 없었다. 그는 왕자비가 돌아오길 기다려서 왕자비에게 무례할정도로 소리치면서 화를 냈다.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왕자비의 목숨을 잃을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앨리스는 자신의 식료품중 일부를 밖에 있는 사람드에게 나눠주러 다녔었다. 그녀는 소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 총을 쏜다고 해도 나는 듣지 못할것이오. 난 청력장애자이고 그에 대해서 뭐하러 걱정하겠소. 난 알지 못할텐데 말이오. 이것은 내 의무요. 내가 뭐하러 태어났겠소?" 그날 이후 그린과 앨리스는 평생의 우정을 쌓았고 둘은 자주 서신을 교환했으며 그가 바레인에 근무할때 앨리스는 그의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 (바레인의 군주가 이 사실을 알고 초대했는데 제랄드 그린이 앨리스의 괴팍한 성격이 나올까봐 걱정하니까 앨리스가 바레인 군주 앞에서 최고로 정중한 태도로 대했다고 합니다. ^^*)
내전은 곧 끝났으며, 국왕은 다시 그리스로 돌아왔고, 앨리스는 염원하던 수녀회 사업을 지속했다.
앨리스는 아들 필리포스가 평범한 해군 장교로 살아갈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들이 짊어져야하는 안드레아의 빚을 걱정했으며 어떻게든 박봉(왕족기준)으로 살아갈 아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겨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앨리스의 친척들은 잘생긴 앨리스의 아들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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