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그리스

앨리스 :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3)

엘아라 2017. 10. 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이제 진짜 책이 나올 모양이거든요.

그래서 좀 바빠서 일단 추석 연휴에는 뭘 못하겠습니다.

(..아프다고 지난달에도 땡땡이 쳤지만..ㅠ.ㅠ )

그래서 있는글을 그냥 쫘악 올리겠습니다.


...요즘 너무 게을러진것같아서 살짝 반성중입니다.

연휴가 끝나고 다시 뵙겠습니다.



앨리스 :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비 (3)

 

"아마 그애도 우리처럼 행복할꺼예요, 그럼 더 바랄것이 없잖아요"

-딸의 결혼에 대해 걱정하는 빅토리아의 편지에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황후의 답장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은 후손들의 삶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불행한 삶을 살던 헤센 대공 부부는 이혼한후 각자의 행복한 삶을 살수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환영할만한 변화도 있었는데, 이제 궁전에서 마음대로 담배를 피울수 있게 된것이었다.

여왕이 죽은후 영국의 궁정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고, 특히 알렉산드라 왕비의 친정식구들이 많이 드나들게 되었다. 왕비의 여러 조카들이 자주 왕궁을 방문했으며 그중 한명이 바로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왕자였다.

안드레아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안드레아스 왕자는 알렉산드라 왕비와 가장 친했던 남동생인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1세의 넷째아들이었다. 게오르기오스 1세는 원래 덴마크 왕자였지만, 그리스 국왕으로 선출 된뒤 게오르기오스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를 다스리고 있었다.

 



안드레아스 왕자

 

안드레아와 앨리스가 처음 만난것은 아마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때였을것이다. 대관식이 한번 연기 되었는데, 이때문에 대관식을 위해 영국으로 왔던 많은 왕족들은 시간이 남았고, 안드레아와 앨리스는 이 동안 사랑에 빠져버렸다. 18살도 되지 않은 딸이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겠다고 우겼을때 앨리스의 어머니 빅토리아는 무척이나 걱정했다. 딸을 설득하기 위해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귀천상혼한 가문 출신의 방계가문 공녀가 통치가문으로 시집가는것이 얼마나 어려운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해봤고, 바다에 나가있던 남편에게 잠시 돌아와서 딸을 설득해달라고 하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빅토리아는 동생인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이 문제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황후는 "아마 그애도 우리처럼 행복할꺼예요, 그럼 더 바랄것이 없잖아요."라는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약혼때 쯤의 앨리스

 

결국 빅토리아는 딸의 결혼을 승락했고, 둘은 정식으로 약혼했다. 그리고 1903년 10월 다름슈타트에서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왜냐면 그해 9월에 러시아의 짜르가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수많은 유럽의 왕족들이 참석했다. 에드워드 7세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라 왕비가 딸 빅토리아 공주를 데리고 참석했다. 그리스 왕가 식구 모두가 참석했으며,앨리스의 러시아 이모들 가족 역시 모두 참석했다. 숙모였던 베아트리스 공주는 딸이자 후에 스페인 왕비가 되는 에나를 데리고 참석했으며, 앨리스의 이모였던 이레네 왕자비 역시 가족들과 함께 참석했다. 작은 도시였던 다름슈타트에서 수많은 유럽의 왕족들이 즐거운 휴가를 즐겼다.

 



결혼후 다름슈타트에서 앨리스와 안드레아

안드레아스 왕자는 헤센의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결혼후 앨리스는 남편 안드레아와 함께 다름슈타트에 잠시 머물렀다. 안드레아는 그리스 국왕의 허락을 받고 결혼전부터 헤센의 레드 드라쿤으로 복무중이었었다. 둘이 머문 시간은 좀더 길어졌는데 왜냐면 결혼 육주후 앨리스의 외사촌이자 헤센 대공의 사랑하는 외동딸이었던 헤센의 엘리자베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외삼촌을 홀로 둘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리스왕족으로 의무가 있었으며 이제 남편과 함께 새 조국으로 돌아가야했다.

 

앨리스의 새 조국이 된 그리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복잡한 곳이었다. 시아버지인 게오르기오스 국왕은 매우 상냥한 사람이었으며 후대에 입헌군주제를 가장 잘 적용한 국왕이라는 평가를 얻기는 했지만, 그리스국왕으로 지내던 내내 퇴위를 고려했었으며 몇번의 암살시도도 있었다. 게오르기오스 국왕은 정교회를 믿지 않았지만, 그는 정교회를 독실하게 믿었던 러시아 여대공과 결혼했다. 러시아의 니콜라이1세의 손녀였던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은 겨우 열여섯살에 그리스의 왕비가 되었고 평생 러시아를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으며, 정치적으로 국왕과 함께 자주 공격당하긴 했지만, 대부분 그리스 국민들은 왕비를 사랑했다. 이 국왕 부부에게는 딸 둘과 아들 다섯이 있었고, 앨리스의 남편 안드레아는 그중 넷째였다.

 



게오르기오스1세와 올가 왕비

그리고 아이들

넷째 아들인 안드레아스 왕자와 다섯째 아들인 크리스토포로스 왕자는 없습니다.

가운데 강아지를 안고 있는 남자는 러시아의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앨리스의 남편인 안드레아는 왕자였지만 어려서부터 군인으로 교육받았고 이때문에 그리스 육군에 자신의 모든것을 바쳤다. 그는 그리스인이라는 자각이 가족들중 가장 강한 인물이었는데, 형제 자매들과 달리 부모와 이야기할때는 꼭 그리스어로 이야기했다고 알려져있다. 평생 군인이자 왕족으로 그리스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안드레아에게 혼란한 그리스 정치는 이후 그의 삶에 커다란 타격을 주게 된다.

 

신혼시절 앨리스는 다른 신혼부부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다. 남편과 함께 시부모가 있는 왕궁에서 살았는데, 아이들이 태어났고 그리스어를 배운후 "영국 왕족의 의무"였던 자선 사업을 그리스에서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혼란한 그리스 정치때문에 오래 지속될수 없었다.

 

1909년 그리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왕족들의 편애에 대한 장교들의 불만때문에 일어난 쿠데타였기에, 왕족들은 모두 군 지위를 사임해야했으며, 공식석상에서 모두 모습을 감춰야했다. 안드레아 역시 지위에서 물러났다. 여러친척들을 만나거나 아이들과 함께 지내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지위에 해임된것에 매우 불안해했다.

 



오촌인 러시아의 여대공들(니콜라이2세의 딸들)과 함께 있는 앨리스의 두딸

 

 

 

하지만 곧 안드레아가 다시 군대로 가고, 앨리스는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1912년 제 1차 발칸전쟁이 일어났으며, 왕족들은 모두 군대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