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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147) 헨리 피츠로이 : 헨리 8세의 아들(첫번째)

엘아라 2017. 7. 10.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진짜 한 세주간 멍때리고 있었더니 이제 글이 조금 읽히긴 합니다만...

사시가 또 심해지네요..ㅠ.ㅠ 지난번에 병원 예약 미뤘더니 8월에나 진료가 가능해서 말입니다.

뭐 사시가 진료 받는다고 좋아지는 증상이 아니라 수술로만 치료가 가능한 증상이라 어쩔수 없긴 하지만 컨디션이 나쁘면 좀더 심해지거든요. 요즘 상태가 메롱하긴 메롱한가봐요-0-;;;;;;


정부들과 그 후손들...(147) 헨리 피츠로이 : 헨리 8세의 아들






헨리 피츠로이

Henry FitzRoy, 

1st Duke of Richmond and Somerset 

(15 June 1519 – 23 July 1536)


헨리 8세와 그의 정부였던 엘리자베스 블런트의 아들이었던 헨리 피츠로이는 1519년 6월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해에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캐서린 왕비는 또 한번 아이를 유산했었고, 이런 상황에서 건강한 아들이 태어난것은 헨리 8세가 아내와 이혼하겠다는 결심을 하는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있기도 합니다.


엘리자베스 블런트는 아이를 낳을때 쯤에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궁정에서 내보내져서 다른 곳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아이는 국왕의 아이라고 알려졌으며 헨리 8세는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됩니다. 헨리 피츠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누가 봐도 아이의 아버지가 국왕이라는 것을 알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헨리라는 이름 역시 국왕의 이름이었죠.



헨리 8세

헨리 피츠로이의 아버지


헨리는 비록 서자였지만 국왕이 인정한 아들이었으며, 오래도록 헨리의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캐서린 왕비는 메리 외에는 살아남은 딸들이 없었으며, 후에 앤불린과의 사이에서도 엘리자베스 밖에 없었죠. 이런 상황은 아마도 헨리 8세가 자신의 서자였던 헨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딸들이 잘못되거나 후계자가 없을 경우 헨리 8세는 자신의 아들인 헨리를 좀더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며, 이런 아들에 대해서 교육 역시 다르게 시켰을 것입니다. 아마도 헨리 피츠로이는 메리나 엘리자베스처럼 국왕의 자녀들과 비슷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 추측할수 있습니다. 


헨리 8세는 1525년 자신이 인정한 유일한 서자였던 헨리 피츠로이의 지위를 높이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아내인 캐서린 왕비와의 사이에서 더이상 아이를 기대할수 없게 되면서 였을 것입니다. 캐서린 왕비와의 사이에서는 딸인 메리 외에는 살아남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는데 헨리 8세에게는 형이었던 아서가 있었지만, 자녀없이 사망했었으며, 헨리 8세가 헨리 7세의 유일한 남성 후계자였습니다. 이 상황은 헨리 8세가 아들에게 집착하는 중요한 원인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아마도 당대 많은 사람들처럼 남성후계자를 통해서 가문의 혈통을 이어가야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적자 아들을 기대할수 없었으며, 가문의 이름을 이을 조카도 없었습니다. 결국 헨리는 자신이 인정한 유일한 아들이었던 헨리 피츠로이에 대해서 좀더 고민을 했으며 결국 이 아들의 지위를 높이기로 결정했을 것입니다. 헨리 피츠로이가 아무리 헨리 8세의 아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부모가 정식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자식이었기에 상속에서 제한을 받는 것은 어쩔수 없는 것이었고, 아마도 헨리 8세는 이런 상황을 좀더 완화시키고 자신이 아들을 얻지 못하게 될 경우를 대비한 것일 수 있습니다.



헨리의 이복 누나

메리


여섯살이었던 헨리 피츠로이는 국왕의 아들로 인정받았으며 거주지도 부여받게 됩니다. 이것은 헨리 8세가 헨리 피츠로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