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드디어 캐서린 이야기가 끝이고 다음주부터는 앤 이야기군요-0-;;;
잉글랜드의 왕비들...(101) 아라곤의 카타리나 : 헨리 8세의 부인(일곱번째)
아라곤의 카타리나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
Catherine of Aragon
(Catalina; Katherine)
(16 December 1485 – 7 January 1536)
캐서린을 궁에서 쫓아낸 헨리 8세는 이제 앤과 결혼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캐서린과의 결혼을 끝내는 문제는 쉽지 않았습니다. 교황의 판결은 계속 연기되었으며, 캐서린은 절대 자신이 왕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했습니다.
사실 캐서린과 헨리 8세의 이혼문제는 후계자를 원했던 헨리 8세에게 아내인 캐서린이 더이상 아이를 낳아줄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헨리 8세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은 앤 불린이었구요. 헨리 8세는 자신이 형수와 결혼햇기에 저주 받아서 아들을 얻을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문제는 캐서린과 아서와의 결혼에 대해서 헨리 8세와 캐서린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헨리는 어쨌든 형과 결혼했던 여성과 결혼해서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던 반면, 캐서린은 아서와의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그 결혼은 무효라고 생각한 것이었죠. 이때문에 캐서린은 자신의 헨리와 결혼할때 처녀였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적법한 아내인 자신을 내쫓을수는 없다고 여겼었습니다.
헨리 8세는 아내를 내쫓은 뒤 앤 불린과 비밀결혼을 한뒤 교황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캐서린의 조카였던 황제 카를 5세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덜 걱정하고 있었는데 황제는 투르크와의 전쟁때문에 일단 이모문제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때를 노려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 시키려했죠. 하지만 결국 교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에 격분한 헨리 8세는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가톨릭과의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헨리와 앤이 궁정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동안 캐서린은 시골로 쫓겨나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많은 사람들은 캐서린을 동정했으며 왕비로 오래도록 존경받았던 캐서린을 쫓아낸 앤에 대해 반감을 드러냈었습니다. 헨리는 딸인 메리를 앞세워서 캐서린에게 이혼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캐서린은 절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메리 역시 어머니의 고난에 슬퍼했었습니다.
캐서린의 딸 메리
어머니가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메리 역시 아버지에게서 외면당했는데 특히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던 앤 불린은 메리를 자신의 딸의 시녀로 삼는등의 모욕을 줬고 이런 상황은 후에 메리가 동생인 엘리자베스를 매우 나쁘게 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캐서린의 처지는 젊은 시절처럼 매우 궁핍해져갔는데 헨리 8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캐서린에게 돈을 주지 않았으며 감금시키고 주변 시종들을 만나는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힘든 삶에 직면하면서 캐서린은 더욱더 종교에 의지했으며 이런 고난을 겪는 캐서린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동정하게 되고, 캐서린을 내쫓은 앤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앤이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캐서린이나 메리를 더욱더 핍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계속 캐서린의 상황은 나빠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캐서린의 건강은 서서히 나빠졌는데 아마도 많은 스트레스등으로 인해서 암을 앓기 시작했었던 듯합니다. 캐서린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에 헨리나 앤은 도리어 안심을 했었는데, 황제가 위독한 이모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을때 헨리는 그 이모가 곧 죽을것이라 황제가 개입할수 없을것이라고 이야기했었다고 합니다. 캐서린의 핍박받는 이미지 때문에 당대에 앤이 캐서린을 독살하려한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졌었다고 합니다.
앤 불린
결국 캐서린은 잉글랜드에서 궁핍함과 어려움 속에서 사망합니다. 그녀가 죽었을때 제일 기뻐한 사람은 바로 헨리 8세였습니다. 그는 캐서린의 사후에 캐서린을 위해 훌륭한 장례식을 치뤄줬을 정도였습니다. 이제 더이상 캐서린의 문제로 골치아플 일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앤 불린 역시 자신의 지위가 안정될수 있다는 사실에 캐서린의 죽음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왕비로 지냈으면서 핍박받았음에도 절대 물러나지 않았던 캐서린에 대해서 애도를 표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국왕의 명때문에 대놓고 캐서린에 대한 애도를 표할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헨리 8세는 캐서린을 내친후 그녀를 "웨일즈 공비"의 예로 불렀고 무덤 역시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캐서린의 딸인 메리는 어머니인 캐서린처럼 긍지가 강하고 강인한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핍박받은 기억이 강했으며 이런 핍박의 중심에 있었던 앤 불린이나 신교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고 그 결과 "블러디 메리"라고 불릴정도로 신교에 대해 핍박을 강요했었습니다.
잉글랜드의 메리 1세
"블러디 메리"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헨리 8세와 여인들(앨리슨 위어, 박미영, 루비박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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