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98) 아라곤의 카타리나 : 헨리 8세의 왕비 (네번째)

엘아라 2016. 12. 2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캐서린으로 두달하겠습니다..ㅠ.ㅠ


잉글랜드의 왕비들...(98) 아라곤의 카타리나 : 헨리 8세의 왕비 (네번째)




아라곤의 카타리나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

Catherine of Aragon

(Catalina; Katherine)

(16 December 1485 – 7 January 1536)

후대의 상상화


어머니 이사벨 여왕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고 알려진 캐서린은 아마도 어머니의 정치 감각도 어느정도 물려받았던듯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인내만 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시아버지에게 어떻게든 자신의 처지와 곤경을 알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캐서린의 아버지인 페르난도는 사위인 필립이 캐서린의 결혼을 깨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딸의 문제에 다시 개입합니다.

페르난도는 에스파냐 대사가 병으로 위중하게 되자, 신임 에스파냐 대사를 보내기전 딸에게 "임시대사"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이것은 캐서린이 이제 에스파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했으며 헨리 7세가 이전과 달리 어느정도는 잘 대해주게 됩니다.


게다가 카스티야 상황도 변하게 되는데 캐서린의 형부인 필립이 죽으면서 카스티야는 다시 캐서린의 아버지인 페르난도의 손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딸이자 카스티야의 여왕인 후아나를 연금하면서 "광기"를 언급했습니다. 아마도 남편을 너무 사랑했던 후아나는 남편이 시녀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조차 히스테릭하게 반응햇다고 알려져있는데, 이때문에 남편의 죽음으로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후아나는 통치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졌으며, 후아나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를로스(카를)은 너무 어렸기에 결국 페르난도가 다시 카스티야를 통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카스티야를 장악하게 되면서 페르난도는 다시 딸의 결혼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딸의 곤궁함을 알게 되었으며 계속 미루던 지참금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게 되죠. 하지만 지참금을 자꾸 미뤄서 헨리 7세의 인내심을 시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지참금을 연기할수록 캐서린의 처지는 더 곤궁해졌기에 캐서린은 어떻게든 아버지를 설득하려했었다고 합니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캐서린의 아버지


그리고 캐서린은 시아버지의 야심도 이용하게 됩니다. 헨리 7세는 과부가 된 캐서린의 언니 후아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면 후아나는 카스티야의 여왕이었으며 후아나와 결혼하게 될 경우 카스티야의 통치자가 될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캐서린의 아버지인 페르난도는 이를 용납하지 않을 테지만, 만약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헨리 7세가 캐서린에게 좀더 잘 대해줄것이며 아들과의 결혼을 허락할것 역시 알았습니다. 결국 캐서린은 언니와의 혼담에 대해서 긍정적 반응을 보여주려 했고 페르난도 역시 확고하게 거절하지 않으므로써 상황을 유연하게 만들려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후아나와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고 지참금도 오지 않았기에 헨리 7세는 다시 캐서린을 박대하게 됩니다. 게다가 캐서린은 에스파냐에서 온 고해신부를 의지했는데 그는 이 모든것은 헨리 7세의 잘못이며 만약 그가 계속 박대한다면 조약을 깨고 에스파냐로 돌아가도 된다고 조언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캐서린이 헨리 7세에게 더이상 순종적이지만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에스파냐에서 신임 대사가 부임했지만 신임 대사는 고압적으로 헨리 7세에게 결혼식을 요구했기에 결국 상황을 더 악화시키게 되죠. 


캐서린은 궁핍함을 참지 못하고 헨리 7세에게 사정하러 갔으며 헨리 7세는 마치 동냥하듯이 몇푼을 주고는 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캐서린은 너무나 모욕적이었다고 여겼었습니다.(..--;; 그아부지에 그아들인듯...)



헨리 7세


하지만 캐서린에게는 지지세력들이 많았습니다.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을 호의적으로 생각했으며 국왕이 다른 혼처를 찾는것에 대해서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은 헨리 7세가 대놓고 캐서린을 쫓아보낼수는 없게 만들었으며 또 다른 혼처를 적극적으로 찾을수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은 결국 헨리 7세가 죽음으로써 끝나게 됩니다. 1509년 4월 22일 헨리 7세는 결핵이 악화되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후계자인 아들 헨리를 불러 캐서린을 박대한것을 후회하며, 캐서린과 결혼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망하죠.


헨리 7세의 죽음으로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을 막고 있던 장애물이 없어지게 됩니다. 캐서린의 아버지는 결혼식이 끝나는 즉시 나머지 지참금을 주겠다고 약속했었죠. 사실 헨리는 아름답고 우아한 캐서린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죽었고, 이런 그를 돌봤던 캐서린에게 마음이 끌렸던 것입니다. 사실 그는 이미 약혼 서약을 철회했었기에 캐서린과 반드시 결혼할 의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캐서린에게 정중했으며 아버지가 죽고 난뒤 캐서린과 결혼합니다.


이렇게 캐서린은 드디어 헨리 8세와 결혼할수 있었습니다.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헨리 8세와 여인들(앨리슨 위어, 박미영, 루비박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