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96) 아라곤의 카타리나 : 헨리 8세의 왕비 (두번째)

엘아라 2016. 12. 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카타리나만 해도 자료가 넘쳐나는군요-0-;;;


잉글랜드의 왕비들...(96) 아라곤의 카타리나 : 헨리 8세의 왕비 (두번째)



아라곤의 카타리나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

Catherine of Aragon

(Catalina; Katherine)

(16 December 1485 – 7 January 1536)


1497년 약혼식을 거행했지만, 카타리나는 약속대로 1498년 잉글랜드로 떠나지는 못합니다. 카타리나의 출발은 1500년으로 연기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아서가 성인의 나이가 되는 때로 둘이 만나서 바로 결혼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동안 카타리나는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는데 카타리나가 잉글랜드어를 알지 못했기에 언어 소통에 제약이 있을 것을 걱정한 잉글랜드 왕가의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또 시어머니가 될 엘리자베스 왕비는 며느리가 잉글랜드에 적응할수 있는 여러가지 행동습관을 연습도록 하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사실 이 결혼은 잉글랜드 측에서 더 열렬했었으며,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아쉬울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했었던 카타리나의 아버지 페르난도 2세는 여전히 요크가문의 후계자가 살아있는 것에 우려를 표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딸의 결혼을 성급하게 진행하는 것을 경계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1499년 5월 카타리나와 아서의 대리혼이 열리게 됩니다. 재미난 것은 보통 대리혼은 신부측에서 치뤄진뒤 신랑한테 가서 결혼하는 경우가 많은데 카타리나의 경우 잉글랜드의 아서의 영지에서 아서와 신부 대리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아서


대리혼이 치뤄진뒤 아서는 이제 아내가 된 카타리나에게 편지를 보냈었습니다. 물론 다정한 말이 적힌 편지이긴 했지만 이 편지들은 왕자의 가정교사들의 감독하에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타리나 역시 남편인 아서에게 답장을 보냈었습니다. 둘의 편지는 카타리나가 잉글랜드로 갈때까지 이어졌었다고 합니다.


이미 대리혼을 치뤘지만 여전히 에스파냐쪽에서는 결혼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특히 페르난도 2세는 요크가문의 후계자인 워릭 백작의 존재를 우려했었죠. 결국 헨리 7세는 1499년 11월 워릭 백작을 참수형에 처하므로써 페르난도가 다른 소리 할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1501년 드디어 카타리나는 잉글랜드로 향하게됩니다. 어머니 이사벨 여왕은 막내딸을 위해 많은 혼수를 해줬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더 화려한 행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헨리 7세는 튜더 왕가의 다음 대의 왕비를 맞이할 화려한 행사를 준비했었습니다. 


1501년 10월 카타리나는 수행원들과 함께 잉글랜드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런던으로 향하게 됩니다. 잉글랜드의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가톨릭 군주들의 딸이자 장차 잉글랜드 왕비가 될 여성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중에는 그녀의 시아버지였던 헨리 7세도 있었는데 국왕은 며느리가 런던으로 오는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아들과 함께 며느리를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국왕 일행과 카타리나 일행은 햄프셔에서 만나게 되죠. 시아버지인 헨리 7세는 며느리의 외모를 보고 매우 흡족해했다고 합니다. 카타리나는 젊은시절 괜찮은 미모였다고 알려진 어머니 이사벨 여왕을 가장 많이 닮은 딸이었으며 이런 아름다운 며느리를 본 헨리 7세는 며느리의 미모에 흡족해하면서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명했다고 전해집니다. 남편인 아서 역시 아름다운 아내를 보고서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둘은 서로 라틴어로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만 둘의 발음이 달라서 의사소통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서와 캐서린의 모습을 담은 태피스트리


아서와 카타리나가 만난 10일후인 1501년 11월 14일 아서와 카타리나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결혼식의 끝은 훗날 모든 사람들을 의문에 빠지게 만들 초야였습니다. 

침대에 축복이 내려졌으며 신랑 신부가 침실에 남겨지게 됩니다. 사실 교회법상 결혼의 완성은 부부간에 성적 결합이 있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아서는 다음날 "결혼을 완성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카타리나는 초야를 치루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임종때 조차 그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아마 신앙심이 깊었던 카타리나가 죽음의 순간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어린 나이였던 아서와 카타리나에게 결혼의 완성은 힘들었을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서가 결혼 다음날 결혼을 완성했다고 떠들어 댄것은 어쩌면 자신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이야기였을 수도 있습니다. 

뭐 카타리나가 죽음의 순간까지 거짓말을 했을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거짓말을 스스로 믿는 경우에는 죽을때까지도 그 거짓말을 믿을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이 이야기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이야기중 하나입니다. 


이제 잉글랜드에서 캐서린이라고 불리게 되는 카타리나는 모두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 됩니다. 그녀의 시부모는 그녀에게 매우 흡족해했으며 남편 역시 아름다운 아내에게 빠져든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이 행복은 곧 끝나버리게 됩니다. 결혼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아서 부부는 "잉글랜드 땀병"이라는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이 질병은 오래도록 "흑사병(페스트)"와 혼돈된 질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땀병은 주로 잉글랜드에서 발생해서 매우 치명적 결과를 낳았던 질병이었습니다. 페스트와는 질병 양상이 달랐으며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주로 튜더 가문 시대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질병이기도 했습니다. 이름에서처럼 땀을 엄청나게 흘리면서 사망했기에 땀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 병은 건강한 젊은 층에서 주로 나타나는 질병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 무서운 질병에 웨일즈공 부부가 걸린것이었습니다. 카타리나는 질병에서 회복되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서는 1502년 4월 결혼하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사망합니다. 



아서


장남의 죽음에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 왕비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헨리 7세는 장남의 죽음에 슬픔을 가눌수 없었는데 엘리자베스 왕비는 남편에게 "우리에게는 아이들이 남아있고 또 다른 아이들을 가질 정도로 젊다"라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은 잃은 어머니였던 엘리자베스 왕비 역시 비통함은 어쩔수 없었습니다.


카타리나는 갓 결혼한 직후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아서"와 결혼했다기 보다는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와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때문에 카타리나의 운명은 매우 복잡하게 됩니다. 만약 그녀가 그냥 아서와 결혼한 것이었다면 남편이 죽은뒤 고향으로 돌아가서 재혼을 하던가 아니면 남편을 기리면서 홀로 살던가 할수 있었을 것입니다.(아마도 아버지 페르난도가 재혼시켰을 것입니다만...) 하지만 그녀는 국가간의 조약으로 "잉글랜드 왕위계승자"와 결혼한것이었고 이것은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발목을 잡게 됩니다. 물론 그녀가 가져온 엄청난 혼수 역시 한 몫했었기도 하구요.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헨리 8세와 여인들(앨리슨 위어, 박미영, 루비박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