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95) 아라곤의 카타리나 : 헨리 8세의 왕비 (첫번째)

엘아라 2016. 12. 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0-;;; 헨리 8세의 여섯왕비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차례입니다.

왕비 한명당 한달을 이야기하면 무려 반년이군요-0-;;;;

그전에는 마칠것은 같습니다만 일단 시리즈 뭐할지 심각하게 고민 안해도 되겠군요

(물론 이미 맘속에서는 스코틀랜드 왕비들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0-;;;;)


잉글랜드의 왕비들...(95) 아라곤의 카타리나 : 헨리 8세의 왕비 (첫번째)




아라곤의 카타리나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

Catherine of Aragon

(Catalina; Katherine)

(16 December 1485 – 7 January 1536)

11살 무렵



후에 "캐서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되는 아라곤의 카타리나는 1485년 12월 마드리드 인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가톨릭 공동군주"라고 알려지게되는 아라곤의 페라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로 카타리나는 부부의 막내딸이었습니다. 아라곤의 국왕과 카스티야의 여왕이 결혼하면서 "에스파냐"가 성립되었으며 카타리나는 이 에스파냐의 공주였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통치자로써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중세시대에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보통 여성 계승자의 경우 남편이 주로 권한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었습니다.



카타리나의 부모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가톨릭 공동 군주"


이베리아 반도 출신이었던 카타리나는 복잡한 혈연관계에 놓여있었습니다. 이베리아 반도의 왕가들은 대부분 혈연관계로 맺어져있었는데, 이를테면 당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본가와 분가 관계였기에 카타리나의 부모는 관계였습니다. 또 카타리나는 후에 시집가게 되는 잉글랜드 왕가와도 혈연관계였습니다. 랭카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의 딸인 필리파는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는데, 카타리나의 외할머니가 포트루갈의 공주로 필리파의 손여였습니다. 또 증조할머니가 랭카스터 공작의 딸이자 카스티야 국왕의 외손녀였던 랭카스터의 캐서린이었죠. 카타리나의 이름 역시 이 증조할머니에게서 따온것이기도 했습니다.



카타리나의 잉글랜드 쪽 조상

곤트의 존 

랭카스터 공작

헨리 4세의 아버지


어린 시절 카타리나는 작은 키에 긴 붉은 머리, 동그란 푸른눈에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에 잉글랜드에 왔을때 초상화는 금발로 표현되는것을 보면 아마도 붉은기가 많이 도는 금발이었던듯합니다. 카타리나는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매우 교육을 잘 받게 됩니다. 이사벨 1세는 매우 뛰어난 여성으로 훌륭한 통치자이자 모범적인 어머니였으며 신앙심도 매우 깊었습니다. 이런 이사벨은 자녀들의 교육에 매우 신경을 썼는데 좋은 선생님을 모셔와서 자녀들을 교육시켰다고 합니다. 훗날 헨리 8세는 아내인 캐서린의 학식이 매우 깊은것에 자랑스러워하고는 했다고 합니다.

카타리나는 교회법,일반법을 비롯해서 문학,철학,역사,지리등을 배웠습니다. 또 에스파냐어와 라틴어를 읽고 쓰는것을 배웠으며, 프랑스어와 그리스어 회화도 배웠습니다. 당시에는 귀족 남성들도 이런 교육을 받는 이들이 드물었으며 특히 여성이 라틴어를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것은 진짜 흔치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또 카타리나는 당대 여성으로써 배워야하는 것들도 배웠습니다. 요리,춤,음악,미술,자수놓기,바느질,물레질 등등을 배웠다고 합니다.

또 카타리나는 어머니와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매우 신앙심이 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그녀가 고난에 빠졌을때 신앙에 의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카타리나의 어머니

이사벨 여왕


가톨릭 군주들의 딸로 카타리나는 외국 왕족들에게 매우 좋은 신부감이었습니다. 특히 그녀는 잉글랜드쪽에서 매우 탐내던 신부감이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이었던 헨리 7세는 비록 보스워스 전투의 승리로 잉글랜드 왕위를 얻었으며 아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통해 후손들의 요크 가문의 왕위계승권도 확보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크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존재했으며, 또 헨리 7세가 랭카스터 가문의 후계자라고 주장하긴 했지만 정통성면에서는 떨어졌었습니다. 이에 그는 외국 왕가와 통혼하므로써 왕가의 위상을 높이려했는데 특히 랭카스터 가문과 연결고리가 큰 이사벨 1세의 딸을 며느리감으로 여겼던듯합니다. 이사벨 1세의 할머니는 랭카스터 공작의 셋째딸인 캐서린이었으며, 이사벨 1세의 어머니의 할머니는 랭카스터 공작의 장녀였던 필리파였기에 혈통상으로 랭카스터 가문의 적자들의 후손이었던 이사벨 1세의 자녀들은 튜더 가문에 랭카스터 가문의 정통성을 더 확보해줄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결국 헨리 7세는 아들과 가장 나이대가 맞는 가톨릭 군주의 막내딸인 카타리나에게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헨리 7세


1489년 메디나 델 캄포 조약에 따라 헨리 7세의 장남이었던 아서와 가톨릭 공동군주의 막내딸이었던 카타리나의 결혼이 결정됩니다. 둘은 교회법상 성년으로 인정되는 나이가 되면 바로 결혼하기로 합의가 된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세부사항은 계속 협상을 거쳤으며 1493년 카타리나가 1498년에 잉글랜드로 가기로 합의를 했다고 합니다. 


아마 카타리나는 어린시절부터 잉글랜드 왕비가 될것이라고 여겨졌으며 조약이 체결된뒤에는 잉글랜드의 왕태자비로 궁정에서 대접받고 훈육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1497년에는 잉글랜드에서 결혼의 증표로 반지등이 왔으며, 아서와 카타리나의 약혼식이 대리식으로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헨리 7세의 장남

웨일즈 공 아서


하지만 카타리나가 잉글랜드로 가는 길은 그녀가 훗날 잉글랜드에서 겪게될 많은 일들처럼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헨리 8세와 여인들(앨리슨위어,박미영,루비박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