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길어도 참 기네요..-0-;;;;
잉글랜드의 왕비들...(97) 아라곤의 카타리나 : 헨리 8세의 왕비 (세번째)
아라곤의 카타리나
잉글랜드의 캐서린 왕비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
Catherine of Aragon
(Catalina; Katherine)
(16 December 1485 – 7 January 1536)
마리아 막달레나로 묘사된 캐서린
아서의 죽음은 정치적으로 가톨릭 공동 군주와 헨리 7세에게 골치아픈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캐서린의 아버지인 페르난도와 헨리 7세는 공통된 생각이 있었습니다. 바로 캐서린의 재혼에 관한 생각이었습니다. 페르난도는 딸을 잉글랜드 왕위계승자에게 시집보냈었기에 잉글랜드측에서 캐서린을 여전히 왕위계승자의 아내로 여기길 바랬습니다. 다시 말해서 캐서린의 재혼 상대로 아서의 동생이 되길 바란 것이었습니다. 헨리 7세 역시 엄청난 혼수를 가져온 며느리를 돌려보내기 위해서는 그 혼수를 돌려줘야하는데, 이미 상당부분 써버린 돈을 메꿔주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여전히 캐서린을 며느리로 맞았던 정치적 이유는 유효했기에 캐서린을 돌려보내기 보다는 역시 다른 아들과 짝 지워주는 편이 더 괜찮은 방안이었습니다.
아서의 동생이자 이제 형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된 헨리는 캐서린보다 다섯살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이차는 정략결혼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도리어 문제가 되는 것은 캐서린이 헨리의 형과 결혼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법에서는 죽은 형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서의 동생 헨리
헨리 8세
헨리 7세는 며느리에게 결혼의 완성에 대해서 캐물었고 캐서린은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다면 결혼 자체가 무효가 되므로, 캐서린과 헨리가 결혼할수 있는 명분이 완성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당연히 성직자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만 캐서린의 부모가 "가톨릭 공동군주"였기에 교황이 결국 이 문제에 대해서 사면을 내려줄것은 뻔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시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결혼 협상이 진행되게 됩니다. 하지만 이 협상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는데 중간에 헨리 7세의 왕비였던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막내아이를 낳다가 사망하게 되면서였습니다. 헨리 7세가 홀아비가 되면서 헨리 7세의 재혼 문제도 부각되게 되는데, 차라리 아들인 헨리와 캐서린이 결혼하는 것보다는 시아버지인 헨리 7세와 결혼하는 것이 잉글랜드 측에서는 더 괜찮은 방안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헨리 7세와 결혼한다면 일단 교회법상 문제는 피할 가능성이 컸었습니다만, 에스파냐측, 특히 캐서린의 어머니인 이사벨 여왕은 이런 제안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10대인 딸이 헨리 7세와 결혼한다면 결국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될 것이며, 헨리 7세와 엘리자베스 왕비의 아들이 즉위한다면 캐서린의 처지는 매우 곤궁해질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이에 에스파냐측에서는 헨리 7세에게 적당한 신부감을 추천하면서 캐서린과의 혼담을 피했었고 헨리 7세의 후계자와 캐서린과의 혼담을 추진했습니다.
헨리 7세
결국 캐서린은 시동생이었으며 이제 잉글랜드 왕위계승자가 된 헨리와 약혼을 하게 됩니다. 헨리의 나이가 어렸기에 헨리가 성인이 되는 1505년 결혼을 하기로 합의를 했으며 1503년 교황의 사면에 대해서 에스파냐 측에서 책임지기로 하면서 헨리 7세는 정식으로 에스파냐와의 협정서에 서명해서 캐서린을 다시 며느리로 맞기로 합니다. 캐서린은 헨리와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리는데 이때 캐서린은 상복을 벗고 흰색옷을 입고 머리를 풀고 나타나므로써 그녀가 "과부"가 아니며, 이전 결혼은 무효가 되었기에 그녀는 헨리와의 결혼이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1503년 12월 말 결국 교황의 사면장이 내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은 순탄하게 치뤄지지 않게 됩니다. 바로 정치적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1504년 캐서린은 매우 아팠는데 풍토가 다른 잉글랜드에서의 생활이 그녀의 건강을 해쳤던듯합니다. 그런데 이때 캐서린의 어머니인 이사벨 여왕 역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504년 11월 이사벨 여왕이 사망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한동안 알지 못했던 캐서린은 아마도 소식을 받은뒤 큰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더 시련은 어머니의 죽음이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이사벨 여왕의 죽음
가톨릭 공동군주였던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각각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군주로 서로의 지위가 독립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사벨의 죽음은 페르난도가 아라곤의 국왕일뿐 카스티야에서 지위가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게다가 카스티야의 계승자는 캐서린의 언니인 후아나였으며 후아나의 남편인 부르고뉴 공작 필립은 아내의 권로 자신이 카스티야를 통치하려 했었습니다. 이런 에스파냐 내부 상황은 캐서린의 지위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제 캐서린은 단지 아라곤 국왕의 딸일뿐이었으며 비록 언니가 카스티야의 여왕이긴했지만 아이들이 많았기에 카스티야 왕위계승과도 좀 먼 상황이었습니다.
정치적 문제가 이렇게 흐르자 헨리 7세는 캐서린을 며느리로 맞는것을 다시 고려하게 됩니다. 캐서린보다 좀더 좋은 조건의 공주들을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헨리 7세는 캐서린의 연금을 주지 않았으며 이제 캐서린에 대해서 차갑게 대하게 됩니다. 캐서린은 힘든 상황을 견디면서 아버지나 시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하지만 카스티야 문제에 집중하던 캐서린의 아버지 페르난도는 딸을 잉글랜드에서 책임져야한다면서 나몰라라 했으며, 시아버지인 헨리 7세는 캐서린과의 결혼을 어떻게든 깰 구실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캐서린은 궁핍함을 견디면서 결혼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헨리 7세는 결혼할 날짜를 미루게 됩니다. 아들이 성인이 되기 직전 약혼 조건을 파기하는데 "미성년인 아들이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결혼을 약속했다"는 이유를 대면서 파기했으며 이로써 언제든지 캐서린을 돌려보낼 명분을 마련했었습니다. 하지만 헨리 7세는 여전히 캐서린의 혼수를 돌려 줄 마음이 없었으며 아마도 이 혼수를 채우고 남을만큼의 혼수를 주는 쪽이 나타날때까지 캐서린을 여전히 잉글랜드에 붙잡아 두게 됩니다.
캐서린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결혼하기로 한 날짜가 되어서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자신을 나몰라라 했고, 시아버지는 돈도 주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에스파냐에 돌려보내주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캐서린의 아버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그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굉장히 밝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성실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아내를 사랑했다고는알려져있었던 인물입니다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자녀들도 나몰라라하는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헨리 7세는 캐서린의 조카였던 합스부르크의 레오노라와 아들의 혼담을 추진합니다. 레오노라는 캐서린의 언니인 후아나와 형부인 필립의 큰딸로, 이 혼담에 대해서 필립이 카스티야에 간섭하는 장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혼담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합니다. 또 헨리 7세가 아들을 형수와 결혼시키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은 캐서린이 계속 냉대를 받는 원인이 되었죠. 캐서린은 자신이 냉대를 받는 원인에 대해서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시아버지가 자신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약속된 지참금을 다 주는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캐서린은 아버지에게 나머지 지참금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페르난도는 이 지참금을 바로 주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협상과정에서 캐서린은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 합니다. 그녀는 돈이 없었기에 매우 궁핍하게 살았는데 먹을 것이 부족해서 심지어 상한 생선을 사다 먹기도 했으며 새옷을 지을 돈이 없었기에 시집올때 입었던 옷들을 그대로 입어서 낡고 헤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시녀들에게 줄 지참금이 없었기에 시녀들이 혼처를 구하지 못하게 되기도 했었습니다. 게다가 캐서린의 이런 고통에 대해서 가족들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습니다. 언니인 후아나는 남편에게 의존하는 상황이었으며 형부인 필립은 장인을 괴롭히기 위해 캐서린의 결혼을 깨려했죠. 아버지인 페르난도는 딸의 곤경을 어느정도 알면서도 모른척했고, 에스파냐 대사는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햇습니다. 시아버지인 헨리 7세는 캐서린을 방치하다시피 했고 정혼자였던 헨리는 아직 어렸기에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견뎌내는것은 가톨릭 공동군주의 딸이라는 자존심 하나였고 훗날 그녀가 남편에게 모욕당했을때도 끝까지 버텼던것도 아마 이미 이런 고난을 겪었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캐서린의 형부와 언니
부르고뉴 공작 필립과 카스티야의 후아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던 필립은 어머니를 통해 부르고뉴 공작령을 상속받았는데 아내의 권리를 통해서 카스티야를 자신이 다스려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장인인 페르난도 2세와 마찰을 빚었습니다.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헨리 8세와 여인들(앨리슨 위어, 박미영, 루비박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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