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0-;;
내용이 별로 없네요..ㅠ.ㅠ
에스파냐의 인판타들...(36) 인판타 루이사 페르난다 : 페르난도 7세의 딸 (두번째)
인판타 루이사 페르난다
몽팡시에 공작부인
Infanta María Luisa Fernanda of Spain,
Duchess of Montpensier
(30 January 1832 – 2 February 1897)
1868년이 되면서 에스파냐에서는 결국 혁명이 일어나고 이사벨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사벨 2세에 대한 불만이 점차 심해져갈때, 루이사의 페르난다의 남편인 앙투안은 왕위에 대한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1868년 이사벨 2세가 퇴위하고 가족들과 함께 프랑스로 떠났을때, 루이사 페르난다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포르투갈로 떠났었다고 합니다.
에스파냐 상황은 혼란스러웠는데, 이사벨은 아들인 알폰소를 위해서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하고 아들에게 계승권을 물려줍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왕가에서는 가문의 수장을 중심으로 뭉치게 됩니다. 하지만 몽팡시에 공작은 이사벨의 제부면서도 이사벨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통해서 자신이 왕권을 차지하려하는 상황을 보이고있었죠. 이런 상황은 루이사 페르난다의 입장을 무척이나 난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루이사 페르난다 역시 당대 많은 여성들 처럼 남편이 하는 일에 관여할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루이사 페르난다
빈터할터 그림
이런 곤란한 상황의 루이사 페르난다에게 더 곤란한 상황을 만드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바로 남편과 사촌인 세비야 공작의 결투 사건이었습니다. 세비야 공작인 엔리케는 카디스 공작이자 루이사 페르난다의 형부였던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는 몽팡시에 공작과 마찰을 빚고 있었는데, 이사벨이 아니라 스스로 왕위를 노리는 몽팡시에 공작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마찰은 둘이 결투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1870년 몽팡시에 공작은 에스파냐에서 국왕을 선출하는 상황이 되었을때 거기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가 이사벨 여왕의 동생이었음에도, 이사벨의 아들인 알폰소를 지지하지 않고 스스로 국왕이 되려하는 것은 반역으로 볼수도 잇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세비야 공작 엔라캐가 매우 비판했는데 결국 이상황은 둘이 결투를 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처음에 둘은 서로를 못맞쳤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힐때까지 총을 쐈고, 이 결투로 세비야 공작이 사망했었습니다.
이 상황은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는데, 특히 몽팡시에 공작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에스파냐 왕가에서 그에게 적대적이 되는 상황을 연출했었습니다. 또한 에스파냐 내에서도 지지세력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엔리케를 죽인 몽팡시에 공작
세비야 공작이 죽은뒤 루이사 페르난다의 남편은 감옥에 갇혔고 엄청난 벌금을 물었습니다. 또 세비야 공작의 가족들은 몽팡시에 공작을 매우 심하게 비난했었습니다. 몽팡시에 공작은 유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려했지만 유족들은 이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루이사 페르난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생각하지 않고 대놓고 에스파냐 왕위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으며, 이런 상황은 루이사 페르난다가 다른 왕실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좀 힘들어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생활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
루이사 페르난다와 가족들은 여전히 망명중이었는데, 루이사 페르난다의 조카인 알폰소 12세가 즉위하면서 사정이 좀 나아집니다. 알폰소 12세는 루이사 페르난다의 딸인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를 사랑했습니다. 알폰소 12세는 이모부의 행동이 가족 내에서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에서 몽팡시에 공작의 평판을 나쁘게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국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와 결혼했었습니다.
아마 몽팡시에 공작은 가족내에서 말썽이 많았지만, 루이사 페르난다는 적어도 가족들과 좀더 원만히 지내려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알폰소 12세와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가 결혼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
루이사 페르난다의 딸
알폰소 12세의 왕비
루이사 페르난다는 아홉아이를 낳았지만 그중 일곱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기에는 에스파냐 왕비가 된 딸인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조카이자 사위였던 알폰소 12세의 죽음도 봐야했었습니다. 1890년 남편이 죽은뒤에는 세비야에서 조용히 살았다고 합니다.
루이사 페르난다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예술 분야라고 합니다. 특히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프라도 박물관에 있는 예술품 반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언니인 이사벨 2세는 예술품들을 박물관에 그대로 두기 위해서 동생에게 거액을 지불하고 이 예술품들을 인수했다고 합니다.
루이사 페르난다의 아이들은 대부분 어머니보다 먼저 사망했습니다. 장녀인 마리아 이사벨과 후에 갈리에라 공작이 되는 안토니오 마리아 루이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머니보다 먼저 사망합니다. 특히 딸들인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는 모두 결핵으로 사망했었습니다. 알폰소 12세는 너무나 사랑해서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했던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녀의 언니였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재혼하기로 햇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 크리스티나 역시 결혼전에 결핵으로 사망했고 결국 알폰소 12세는 후계자를 얻기 위해 오스트리아-테센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과 결혼했다고 하죠.
나이든 후의 루이사 페르난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쓰고있는글들 > 화요일 : 에스파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스파냐의 인판타들...(28) 인판타 블란카 : 카를로스 4세의 현손 (두번째) (0) | 2016.07.26 |
---|---|
에스파냐의 인판타들...(27) 인판타 블란카 : 카를로스 4세의 현손 (첫번째) (0) | 2016.07.19 |
에스파냐의 인판타들...(35) 인판타 루이사 페르난다 : 페르난도 7세의 딸 (첫번째) (0) | 2016.07.05 |
에스파냐의 인판타들...(34) 이사벨 2세 : 페르난도 7세의 딸(세번째) (0) | 2016.06.28 |
에스파냐의 인판타들...(33) 이사벨 2세 : 페르난도 7세의 딸(두번째) (0) | 2016.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