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에스파냐 왕가가 복잡해지는 시점에 왔습니다. 바로 카를로스 4세의 후손들 입니다.
페르난도 7세가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어서 동생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국왕이 될거라고 모두들 생각했었습니다만, 페르난도 7세는 계승법을 바꿔서 딸인 이사벨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안그래도 나라가 쪼갈라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에스파냐에서 이 상황은 결국 20세기까지 이어지는 아주 복잡하고도 복잡한 정치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어쨌든 그건 이사벨 이야기할때 다루기로하고, 여기 인판타들 이야기도 아주 복잡하드랩니다.
몰리나 백작의 후손들이 있고, 그리고 카를로스 4세의 막내아들의 후손들도 있고 이렇드랩니다.
게다가 또 방계로 가면 자료가 막 부족하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또 이사벨 2세가 즉위한 뒤에는 인판타들의 왕위계승권이 인정되어서 더 복잡한 양상으로 흐르게 됩니다.
...어떻게 할꺼냐구요. 대충 차례로 이사벨 2세와 그 동생인 루이사 페르난다만 하고 다음으로는 몰리나 백작의 후손들 하고 그 다음으로는 카를로스 4세의 막내아들인 카디스 공작의 후손들 이야기한뒤에 다시 이사벨 2세의 딸들 이야기로 갈까합니다.-0-;;;;물론 자료를 찾는데까지 찾아보겠습니다만 없으면 그냥 건너뛰려고 합니다.-0-;;;
그런데 가계도를 그려보니 에스파냐도 만만치 않네요-0-;;본가만 생각했더니 말입니다.
에스파냐의 인판타들...(32) 이사벨 2세 : 페르난도 7세의 딸(첫번째)
에스파냐의 이사벨 2세
Isabel II
(English: Isabella II; 10 October 1830 – 10 April 1904)
어린시절
후에 에스파냐의 여왕 이사벨 2세가 되는 인판타 마리아 이사벨 루이사는 1830년 마드리드에서 국왕 페르난도 7세와 그의 네번째 부인인 양시칠리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페르난도 7세는 세번 결혼했지만 아이들이 일찍죽거나 해서 후계자를 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번째 아내가 죽은뒤 후계자를 얻기 위해 서둘러 결혼했는데 결혼 상대는 첫번째 아내의 조카이자 자신의 조카이기도 한 양시칠리의 마리아 크리스티나였습니다.
페르난도 7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마도 페르난도 7세는 결혼뒤 아내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임신하자 왕위계승법에 대해서 고민했을 것입니다. 사실 에스파냐는 여성의 왕위계승을 인정하는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살리카 법을 따르는 부르봉 가문 출신의 펠리페 5세가 에스파냐의 국왕이 되면서 여성의 왕위계승권은 남성 후손이 단절될때만 가능하도록 바꾸게 됩니다. 이후 페르난도 7세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4세시절 다시 부르봉 가문 이전처럼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복잡한 정치상황때문에 법령이 승인받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페르난도 7세는 결국 1830년 3월 여성의 계승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공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딸인 이사벨이 태어나자 이사벨이 제 1왕위계승자가 되게 됩니다.
이 상황은 이전까지 제 1왕위계승자였던 페르난도의 동생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반발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국왕에게 딸이 태어난 이상 여전히 몰리나 백작이 제 1왕위계승자여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갈등을 초래하게 되는데, 1832년 페르난도 7세의 두번째 아이 역시 딸이었으며 여전히 갈등상황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
이사벨의 숙부
결국 1833년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1830년의 법령으로 왕위는 세살의 이사벨에게 돌아가야했습니다. 하지만 이 법령은 처음부터 몰리나 백작측의 반발을 샀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을때와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게 됩니다. 게다가 마리아 테레지아는 부계쪽 남성친척이 하나도 없었기에 상속을 받은 것이었지만, 이사벨은 숙부들이 살아있었던 관계로 일이 더 복잡하게 흐르게 됩니다. 또 이사벨이 고작 세살이라는 상황 역시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인이 아니었기에 결국 섭정이 필요했으며 이사벨의 어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섭정지위에 올라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함께 있는 이사벨 2세
결국 이사벨의 즉위를 반대하고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실 이 내전은 왕위계승문제로 표출된 것이긴 하지만 에스파냐 내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의 갈등이 원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사벨을 지지하는 측은 나폴레옹 전쟁이후 유럽에 퍼진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몰리나 백작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전 체제로 돌아가는 것을 좀더 옹호하는 측이었기 때문입니다.
1833년부터 시작된 내전은 1840년 이사벨측의 승리로 일단락됩니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사벨의 어머니였던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였습니다. 그녀는 섭정이었지만 문제가 그녀가 남편이 죽은 직후 젊은 근위대 장교와 비밀리에 재혼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사벨측에 매우 치명적이었는데 섭정 모후가 국왕이 죽은 직후에 재혼해서 애를 여럿낳은것은 당시에는 스캔들 감이었으며, 섭정모후의 남편이 그녀에게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결국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재혼이 밝혀지고, 그녀의 평판은 땅에 떨어졌으며 1840년 섭정지위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1842년에는 에스파냐를 떠나야했었죠.
마리아 크리스티나
1840년대
아마 어린시절의 이사벨은 정치적 혼란함의 한가운데 있었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당대 왕족 여성들이 어머니보다는 유모의 품에 더 오래 머물러있긴 했지만 어린시절 아버지를 잃었으며 10대 초반에 어머니마저 강제로 멀리 떠나보내야했던것은 이사벨에게 어느정도 상처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섭정들의 권력다툼이 일어날것을 우려한 의회는 두번째 섭정이 실각한 뒤인 1844년 겨우 만열세살의 이사벨을 "성인"으로 선포하고 더이상 섭정이 필요없다고 선언을 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직까지 교육이 필요한 미숙한 이사벨에게 너무나 많은 권한과 자유를 부여하게 되었으며 결국 이것은 그녀에게 부정적 영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어린 이사벨2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쓰고있는글들 > 화요일 : 에스파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스파냐의 인판타들...(34) 이사벨 2세 : 페르난도 7세의 딸(세번째) (0) | 2016.06.28 |
---|---|
에스파냐의 인판타들...(33) 이사벨 2세 : 페르난도 7세의 딸(두번째) (0) | 2016.06.21 |
에스파냐의 인판타들...(31) 인판타 마리아 이사벨 : 카를로스 4세의 딸(여섯번째) (0) | 2016.06.07 |
에스파냐의 인판타들...(30) 인판타 마리아 이사벨 : 카를로스 4세의 딸(다섯번째) (0) | 2016.05.30 |
에스파냐의 인판타들...(29) 인판타 마리아 이사벨 : 카를로스 4세의 딸(네번째) (0) | 2016.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