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71)앙주의 마르거리트 : 헨리 6세의 왕비(여섯번째)

엘아라 2016. 6. 1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어디 장미전쟁 책을 좀 읽던가 해야지 ..ㅠ.ㅠ

이게 제가 전쟁 이야기를 진짜 읽기 싫어서 인물들 이야기보면서 전쟁이야기는 다 건너 뛰거나 필요한 사항만 읽었거든요. 그랬더니 마거릿 같이 삶이 전쟁과 연결되는 사람들은 ㅠ.ㅠ

..그러고 보니 예전에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전기 읽을때도 장미전쟁 이야기 파트는 그냥 은근슬쩍 안 읽었군요-0-;;;


잉글랜드의 왕비들...(71)앙주의 마르거리트 : 헨리 6세의 왕비(여섯번째) 




앙주의 마르거리트

잉글랜드의 마거릿 왕비

헨리 6세의 왕비

Margaret of Anjou 

(French: Marguerite; 23 March 1430 – 25 August 1482) 

후대의 상상화


1459년 후반기가 되면서 요크 공작은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꼈으며 그의 지지자이자 처남인 샐리스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군대와 합류하려합니다. 하지만 랭카스터 가문을 지지하는 측에서 이것을 저지하려합니다. 1459년의 첫 전투였던 블로어 히스 전투에서 리처드 네빌이 승리를 거둡니다만, 이어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이자 장미전쟁에서 처음으로 대량의 살상이 난 러드포드 브리지 전투에서는 랭카스터 가문측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후 전투 양상은 요크 가문이나 랭카스터 가문이 업치락 뒤치락하는 상황이 됩니다.



랭카스터 가문의 상징인 붉은 장미와 요크 가문의 상징인 흰 장미



특히 1460년 6월의 노스햄프턴 전투에서 다시 요크 가문이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때 국왕 헨리 6세를 요크 가문에 뺏기지 않으려했기에 랭카스터측 주요 인물들이 상당수가 헨리 6세의 막사 근처에서 살해당했고, 헨리 6세는 결국 요크 가문의 포로가 됩니다. 마거릿은 아들과 함께 남편과 함께 있지 않았는데, 전투에서 패배한뒤 마거릿은 아들과 함께 요크 가문을 피해 도망쳐야했습니다. 많은 랭카스터 지지자들이 마거릿을 도왔으며 이들의 도움으로 마거릿은 아들과 함께 간신히 스코틀랜드로 피할수 있었습니다. 마거릿은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3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이었던 마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군대를 얻으려고 협상을 했었습니다.



게데른(헬러)의 마리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2세의 왕비

 제임스 3세의 어머니


헨리 6세를 사로잡은 요크 공작은 국왕과 함께 런던으로 갔으며, 자신이 잉글랜드를 이어받을 합법적 상속자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의 공식 발언은 모두에게 충격이었으며 심지어 그를 지지하던 귀족들 조차도 랭카스터 가문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는 그의 발언에 당황했었다고 전해집니다. 요크 공작은 어머니가 랭카스터 공작의 형인 클라렌스 공작의 후손이므로 랭카스터 공작의 후손인 헨리 6세보다 우선적 왕위계승권을 주장할수 있다고 이야기했으며, 의회는 헨리 6세의 지위는 그대로 인정하지만 헨리 6세의 후계자로 요크 공작과 그 후손을 한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이 상황은 랭카스터측의 반발을 불러 왔으며, 랭카스터 가문의 방계 가문 출신인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를 중심으로 군대를 일으키게 됩니다. 헨리 보퍼트의 가계 역시 좀 재미난데 그의 어머니인 엘리노어 드 보챔프는 워릭백작의 딸로, 헨리 보퍼트의 이모인 앤 드 보챔프는 "킹메이커"인 리처드 네빌과 결혼했고 아버지의 재산과 지위를 모두 상속했었습니다. 언니들을 제치고 말입니다. 결국 서머셋 공작 가문은 요크 공작 가문과도 사이가 나빴으며, 요크 가문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네빌 가문과도 사이가 나빴었습니다. 게다가 헨리 보퍼트의 아버지는 제 1차 세인트 알반스 전투에서 살해당했었기에 요크가문에 개인적 원한도 있었습니다.



보퍼트 가문의 문장


1460년 말 웨이크필드 전투가 요크가문과 랭카스터 가문 사이에서 일어났으며 랭카스터 가문의 대승으로 끝나게 됩니다. 요크 가문의 핵심인물이었던 요크 공작 리처드와 그의 처남인 샐리스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 역시 이때 살해당하는데, 랭카스터 측에서는 요크 가문측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살해에 대해서 오래도록 대중들에게는 마거릿이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었습니다. 특히 마거릿이 요크 공작의 머리를 베어서 그의 머리에 "종이 왕관"을 씌우고 모욕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때 마거릿은 전투에 참가한것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에 있었기에 이에 대해 관여할수 없었으며, 결국 마거릿에 부정적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던 많은 사람들 특히 요크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편견이 들어간 이야기가 퍼진것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요크 공작 리처드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 가문의 핵심 인물들이 사망했지만, 요크 가문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요크 공작과 샐리스버리 백작의 아들들이었던 요크의 에드워드와 "킹메이커 워릭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워릭백작이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샐리스버리 백작이 된 리처드 네빌이 아버지들의 뜻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크 공작의 아들로 마치 백작이었던 에드워드는 아버지가 죽은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권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는 1461년 초에 일어난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에서 랭카스터 가문 사람들에 대해 승리를 거두면서 존재감을 알리게 됩니다.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는 랭카스터 측을 지지하는 웨일즈 세력, 특히 헨리 6세의 이부 동생인 재스퍼 튜더와 재스퍼의 아버지인 오웬튜더가 참가한 전투였는데 이 전투에서 오웬 튜더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 이후 곧 제 2차 세인트 알반스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에드워드의 병력이 웨일즈 근처에 있었다면 워릭 백작의 병력은 런던 근처에 있었기에 둘이 만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랭카스터 측은 이를 막으려 했는데 에드워드가 승리를 거두면서, 워릭 백작을 막아야할 필요성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해 마거릿이 직접 전투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죠. 이 전투에서 요크 가문의 포로였던 국왕 헨리 6세를 랭카스터 측에서 다시 되찾게 됩니다. 이때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헨리 6세를 보호하고 있던 두명의 요크 가문측 기사 역시 랭카스터 가문의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헨리 5세를 따라 백년전쟁에 참전했던 인물들이었는데, 그들이 잡혔을때 마거릿은 아들인 웨일즈공 에드워드에게 그들을 어떻게 처형하면 좋을 것이냐고 물었고. 일곱살이었던 웨일즈공은 그들을 모두 참수하라고 명했다고 전해집니다.(그런데 제가 읽은 뉘앙스는 엄마가 "아들아 저 사람들 어떻게 죽이면 되겠니?"라고 물었고 아들이 "참수하세요"라고 답했다고 나오거든요. 이 이야기에서 마거릿이 "저들을 죽여야하니 살려야하니"라고 물었어야했는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결국 마거릿이나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강하게 들어간 이야기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듭니다.)



하지만 1461년 3월 말에 벌어진 타우턴 전투는 마거릿의 운명을 다시 한번 바뀌게 만듭니다. 타우턴 전투는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로, 두 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여기서 큰 결정이 이뤄 질것을 알았던듯합니다.  이 전투에서 요크 가문측이 승리했는데 랭카스터 측은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됩니다. 랭카스터측 병사들이나 기사들 상당수가 잔혹하게 살해당했으며, 포로가 된후에 처형된 기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내전이 격화되면서 점차 양측에 대한 "원한"이 깊어지면서 생기는 일이 아닐까합니다.



타우턴 전투에서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와 죽은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아들의 모습


헨리 6세는 마거릿과 아들 에드워드와 전장에서 간신히 탈출한 측근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갔습니다. 국왕을 몰아낸 에드워드는 "승리자"로써 자신을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선포합니다. 하지만 마거릿은 남편의 권리이자 아들이 이어받게 될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잉글랜드로 되돌아갈 기회를 모색하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