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잉글랜드의 왕비들...(68)앙주의 마르거리트 : 헨리 6세의 왕비(세번째)

엘아라 2016. 5. 19.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장미전쟁이야기는 읽기 진짜 싫은데 말입니다..

너무 골치아파요..ㅠ.ㅠ


...앙주의 마거릿부터 엘리자베스 우드빌,앤 네빌까지 이야기해야하는군요.

그뒤에 요크의 엘리자베스하고 나면 다시 공포의 헨리 8세의 여섯부인들이야기가 남는군요.

어랏..그럼 이것도 끝이네요-0-;; 올해내로 끝날듯하네요

끝나고 나면 스코틀랜드로 갈지 아니면 정복왕 윌리엄 이전의 잉글랜드를 볼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잉글랜드의 왕비들...(68)앙주의 마르거리트 : 헨리 6세의 왕비(세번째)




앙주의 마르거리트

잉글랜드의 마거릿 왕비

헨리 6세의 왕비

Margaret of Anjou 

(French: Marguerite; 23 March 1430 – 25 August 1482) 



결혼후 이제 잉글랜드에서 "마거릿"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될 마르거리트는 매우 아름다웠으며 교육도 잘 받았고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 출신으로 프랑스 국왕의 조카였기 때문에 잉글랜드 궁정에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많은 외국인 왕비들처럼 그녀 역시 결혼 초기 궁정내에서 세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녀가 기댈만한 인물은 결혼 협상을 성사시켰던 서퍽 공작인 윌리엄 드 라폴과 그의 아내인 서퍽 공작부인 앨리스 초서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수세에 몰리게 되면서 프랑스 출신인 왕비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이 커져갔습니다. 


잉글랜드 왕비로써의 마거릿의 문장


물론 마거릿 역시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을 지지해줄만한 사람들을 궁정으로 모으는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룩셈부르크의 자퀘타를 궁정에 다시 불러 온것이었을 것입니다. 룩셈부르크의 자퀘타는 헨리 6세의 숙부였던 베드퍼드 공작 랭카스터의 존과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으며 자퀘타는 남편이 죽은뒤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아 안정적 생활을 누릴수 있는 잉글랜드로 왔었습니다. 문제는 자퀘타가 잉글랜드로 올때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베드퍼드 공작의 휘하 기사의 아들이었던 리처드 우드빌이었습니다. 헨리 6세는 막 기사가 된 리처드 우드빌을 보내서 숙모를 모시고 오게 했었는데, 이때 만난 리처드 우드빌과 룩셈부르크의 자퀘타는 사랑에 빠져서 결혼해버립니다.

자퀘타가 허락없이 신분이 낮은 남자와 결혼해버렸기에 잉글랜드 의회에서는 말이 많았고, 자퀘타의 재산이었던 지참금을 돌려주지 않으려했다고 할 정도입니다. 어쨌든 이런 스캔들때문에 자퀘타는 궁정을 떠나있어야했는는데, 마거릿이 왕비가 되면서 다시 궁정으로 돌아왔었습니다.


마거릿이 자퀘타를 불러온것에는 자퀘타가 마거릿의 친정쪽으로도 친척관계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퀘타의 여동생인 이자벨은 마거릿의 숙부였던 멘 백작 샤를의 두번째 아내였습니다. 이런 관계 때문에 마거릿은 자퀘타가 자신의 세력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궁정으로 불러왔으며 자퀘타의 남편인 리처드 우드빌에게 남작 지위를 부여하므로써 세습귀족으로 만들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퀘타의 장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마거릿이 적대했던 요크 가문의 국왕인 에드워드 4세의 왕비가 되죠.



엘리자베스 우드빌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의 딸

에드워드 4세의 왕비


프랑스와의 패배와 잉글랜드 내부에서의 갈등이 커지면서 마거릿의 남편인 헨리 6세의 상황도 나빠지게 됩니다. 그는 당대에 이미 군인으로써의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여겨졌으며, 정치에도 그다지 노련하지 못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외가쪽에서 유전 된것으로 여겨졌던 정신적 문제 역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헨리 6세의 외할아버지였던 샤를 6세는 후에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여겨졌는데 그의 외손자인 헨리 6세 역시 같은 문제를 이어받았다고 여겨졌습니다.


결국 마거릿은 남편을 대신해서 점차 정치에 관여하게 됩니다. 특히 1450년 서퍽 공작이 실각한 뒤에는 직접적으로 정치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 요크 공작 리처드의 반대파였던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를 지지했으며 남편을 대신해서 직접적으로 통치행위를 하려합니다. 물론 이런 상황은 마거릿에 대해서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했을 것입니다. 외국인 왕비가 그것도 적국 출신의 왕비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어느시대 어느나라나 곱게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거릿이 잉글랜드 정치에 더 깊이 관여하게 되는 계기가 생겨압니다. 1453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헨리 6세의 아들을 마거릿이 낳았던 것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